▲ 윤 대 영 목 사

우리는 지금 뉴스라는 환시와 환청을 듣고 있다. DMZ(비무장)지대에 길을 내고 철도가 연결이 된다고 한다. 하늘 길도 북한의 하늘을 경유하여 날 수 있다고 가정을 한다. 믿게 한다. 

세계를 돌면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제제를 완화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광화문 거리에 북한의 최고 지도자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시위하고 있고, 지난 역사의 공안 판결들이 모두 뒤집어지고 있으니 이미 평화가 이룩되어서 통일이 된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벌써 이루어진 듯하다. 시각을 바꾸어서 본다면 지나친 견제를 풀면 선제공격을 자초한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뉴스는 모두가 환시와 환청케 하는 정보일 뿐이다. 

전쟁도 평화도 마음에서 온다. GP를 파괴하고 남북정상이 분단선을 넘나들고, 예술단의 공연이 열리고 두 남북 정상이 형제처럼 대화를 해도 아무 쓸모가 없다. 

남북한의 국민과 인민의 마음이 문제이다. '사랑하느냐?'가 관건이다. 며칠 전 북한이 신형무기를 실험했다고 한다. 1초 만에 30km상공을 날고 있는 드론을 격추했다고 한다. 핵무기는 꽁꽁 숨기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북한의 인권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다. 남한은 어떠한가? 과거 청산에 골몰하고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에 한풀이로 과거 집권자와 비집권자의 한풀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갑과 을사이의 한풀이가 매서운 서릿발이 세워져 있다. 한 많은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하다. 

용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관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복수의 칼이 휘둘러지고 있을 뿐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 파묻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국제간의 문제도 그렇다. 일본하면 치가 떨린다. 아무리 원수를 갚아도 한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복수심을 후손들에게 심어주면 다음 세대의 고초가 크다. 

선조가 당한 한 맺힌 역사는 우리가 짊어지고 후손은 세계를 가슴에 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의 마음을 길러주어야 한다. 베트남을 보라.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참혹했다. 하늘에서 폭탄을 비오듯 쏟아 부었고 심지어는 고엽제를 그 풍요로운 자연에 쏟아 부었다. 

한국 국군도 참전하여 수많은 양민과 군인을 학살하였고 잔인한 작전이 나날이 펼쳐졌다. 그러나 저들은 과거를 미래로 덮어버렸다. 다만 잊지는 말아라. 그러나 과거에 메이지 말라 라고 외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한국과도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의 중고차가 베트남의 거리를 달린다. 자동차의 옆구리에는 한국어로 기록된 광고를 지우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더 좋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 마음으로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며, 상대를 수용할 수는 없을까? 그래야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할 수가 있다. 

레미제라블이란 소설이 있다. 주인공 장발장은 배가 고파 빵 하나를 훔친다. 이 죄 때문에 19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점점 사나운 사람이 되고, 주먹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를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복수심을 불태우고 19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을 한다. 자기를 감옥에 넣은 형사를 꼭 죽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하룻밤 쉴 곳도 없다. 어느 신부가 그를 영접한다. 그곳 방에서 자다가 은잔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뛰쳐나온다. 바로 경찰에게 잡힌다. 신부 앞에 나타났을 때 신부는 따뜻이 경찰에게 웃으며 말한다. ‘내가 준 선물입니다. 저 사람이 도둑질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장발장(주인공)보고는 ‘이 은촛대도 주었잖아. 왜 안 가져가지 않았어.’ 이렇게 말한다. 

이 무조건의 뜨거운 사랑이 장발장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사람이 변화되었다. 이 일로 한평생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한다. 복수하겠다는 형사에 대한 미움도 사라졌다. 

사랑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 사랑에 의한 관계 이룸이 평화라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가 많은 유대인을 죽이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다. 일찍이 비스마르크 재상이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만은 평화를 유지해야 독일이 산다고 했건만 두 나라 모두를 대적하여 싸웠다. 

신학자 칼바르트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평화는 원수를 사랑하여 원수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을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

올해도 첫 눈이 내렸고 12월이 다가온다. 
12월 25일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고 고대 왕들은 원수를 죽이는 자였다. 

그러나 평화의 왕은 원수를 위하여 오히려 왕이 스스로 죽는다. 예수가 평화의 왕이 된 것은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다. 

평화란, 사랑이란 나무에만 달리는 열매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평화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전쟁을 위해서 평화를 이용할 뿐이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