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 사

[부천신문] 오래전 이야기이리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어느 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꽂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함박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적선을 구하는 한 걸인이 나타나자 톨스토이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으나 동정 한 닢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에서 ‘형제여’ 하며 그 걸인이자 한센(나병)병이 든 자의 손을 덥석 잡고는 “지금은 베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걸인은 화사한 표정의 얼굴로 “선생님, 나는 오늘 내 생애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저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그리고 나를 형제로 불러 주시다니요. 잡아준 손의 온정은 영원히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허리를 깊이 숙이자 톨스토이는 충격을 받았고 선물 중에 마음의 선물이 가장 소중하단 말이 그의 뇌리를 떠나가지 않았고 그 걸인이 일깨워준 진정한 베풂에 대한 영감으로 후기 ‘부활’이라는 대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새해가 다가왔다. 해를 넘겼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말로 축복을 비는 것이다. 비단 주는 물질은 없다 하더라도 마음만 담아 축복을 한다면 더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어느 날 18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그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유대교의 전통적인 인식은 혈루병이란 죗값으로 받는 형벌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마음을 선물하셨다. 관심, 그리고 공감, 그리고 공유, 그리고 하나 됨의 마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는 하나님의 딸이라고 말하며 그의 잃어버린 정체를 되찾아 주신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 구걸하는 자 앞에서 제자가 물었다. “주여,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이 이렇게 불행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죄로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의 유전으로 이러한 소경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조상들의 죄가 원인이 된 것도 아니다. 더욱이 본인의 죄가 원인이 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리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고 보게 하신 다음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두운 세상에 오랫동안 기다렸구나. 너는 사명자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부터 2,000년 전의 시대에는 어린아이는 인권도, 인격도 인정하지 아니하였던 같다. 한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축복기도를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아이를 예수님 앞으로 안고 나아갔다. 그때 제자들이 만류하고 꾸짖었다. 감히 주님 앞에 아기를 데리고 나오느냐는 것이다. 주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그 아이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하셨다. 

어린아이는 인격도 없을까? 인권도 없는 것일까? 어느 잡지에서 초등학교 4학년이 쓴 글을 보았다. ‘나는 죽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죽고 싶다는 나의 마음을 꾹 참고 지내고 있다. 나의 이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더욱 슬프고 외롭다.’라고 쓴 글이다. 
우리는 가장 나와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마음을 주면서 살고 있는가? 따듯하게 재우고, 맛있는 음식 먹이고, 명품 옷 사주고, 용돈 주고, 학교 보내고, 그리고 과외, 학원까지 보내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녀를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며, 내 아이에게 마음을 주어 보았는가? 
초등학교 4학년이면 사춘기에 접어들 수도 있다. 학교에서 여친, 남친의 삼각관계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보내는 날이 많을 수도 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도대체 이러한 공식들이나 방정식을 어디에다 써먹으라고 이렇게 피 마르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라고 공부에 대한 회의를 가질 수도 있다. 

심장은 뛰고, 꿈은 영롱하다. 하늘의 천사가 되기도 하고, 지옥의 저승사자가 되어보기도 하는 상상의 세계와 무한한 창의의 세계에 어린이는 살고 있다. 그런데 내 아이의 소질이 무엇이며, 그의 취미가 무엇이며,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내 아이의 편에서 마음을 나누어 보았는가? 

마음을 나누어주면 그가 보인다. 그가 보이면 그의 별칭도 생겨난다. 불러보라. 내 아이의 가장 빼어난 부분을 별칭으로 지어 불러보라. 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나뿐인 인격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한 시인이 말했듯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자 그가 되었다고 했듯이 내 아이에게 마음을 베풀어 주고받고 하는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가사 노동한다고 하고, 내 몸 같은 내 아이를 키우는 행복을 육아노동을 한다고 하고, 사랑하므로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행동이 일인데 왜 사랑과 일을 찢어놓고, 행복한 마음을 부역자로 만들고, 반듯한 마음을 보상받지 못하는 징용자로 만들어 가는가? 

어느 주부의 글이 떠오른다. 나는 나의 남편의 내의를 세탁기에 넣기 전 한 번은 그의 땀 냄새를 맡아 본다. 
사랑을 후각으로 받아들여 보면 감사의 눈물이 어느덧 자기의 볼을 적시더라는 말, 우리 서로 베풀기 위해 일하고, 일을 사랑한다고 마음가짐을 고쳐보면 어떨까? 
새해는 베풀기 위해 신바람 나게 일하며 사는 해로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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