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중년만 하더라도 친구들이나 식구들이 모이면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나는 한 번도 체벌을 받지 않았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부모님으로부터 체벌당하지 않았던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완전한 인격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부모님이 자녀에 대해서 무관심했단 말인가?

이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고침을 받아야 할 버릇, 그리고 성격, 뿐만 아니라 잦은 실수를 또한 무례한 행동, 이로운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어른의 생각으로 보면 고쳐할 점과 주의를 주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체벌한번 안하시고 키웠을까?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어린 시절 좀 더 엄하게 양육하여 주셨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현재엔 대체로 체벌을 금하고 있다. 조금만 지나친 체벌이 가해지면 아동학대로 형사적 처벌도 받게 된다. 어느 소아과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왔다. 아이가 소리쳐 우는 것이다. 그리고 주사 맞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이가 이유를 대는 것은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다. 일곱, 여덟쯤 보이는 아이의 자기주장을 기특하게 생각이 되면서도 병원 로비에 대기 해 있는 다른 부모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어머니의 인내도 대단하였다. 20분에서 30분 동안 아이를 설득하는 것이다. 남의 사정은 상관이 없다. 자기 아이의 인격의 손상을 생각하고, 정서를 생각해서 신중하게 다루는 것은 좋으나 과연 그 상황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 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었다.

핑계는 그럴듯하게 대고 있지만 예방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떼를 쓰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자기의 뜻을 관철했다 손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며, 그 어머니 역시 그렇게 자녀를 양육하자면 힘이 많이 드는 양육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기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사안은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주장하는 그 주장이 타당성이 있다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는 자기주장을 꺾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서로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각 가정마다 한 아이를 키우는 곳이 보통이다. 두 부모가 한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소중하기 그지없고, 귀엽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보니 할 수만 있으면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아량내지는 양육방법으로 선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아이의 삶의 자체가 자기의 부모 슬하에서 학교사회로 바뀌고, 더 나아가서는 일반 직장 내지는 공동사회가 될 때,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상황일 때도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고, 관철하려는 애착이 극심할 때 오는 인간관계는 매우 복잡해질 것이다. 우선 자신이 바라는 사회가 되어야 그는 행복해 할 것이다. 시대가 변화해가고 있다.

그래서 삶의 양식도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만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저마다 불편함이 있고, 불만도 있으며 원망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배려하고, 참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다 행복한 미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모두를 섬기는 기구로서 공복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공복은 결국 사회 각자의 요청을 잘 파악하여 각인의 의사의 공통분모를 찾고, 그 찾은 공통분모를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해서 공정하게 그 사회 구성원들을 섬겨간다면 이 보다 더 이상적인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공복이 자기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하여 어릴 적부터 자기 기준 내지는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복이 되면 사회구성원의 전체의 의견을 모으고 공동의 유익과 뜻을 담는 법과 제도를 제정하여 그 사회 구성원들을 섬길 수 있을까? 사회 구성원은 불편해할 것이며, 결국은 정권을 맡는 사람들을 탄핵하는 데까지 가는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이다.

국회에서 제기 되었던 한 사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은 죽었다고 한다. 칠십여명은 중상을 당했다고 한다. 경찰이 방패로 밀고, 방어하는데 가슴들이 부딪혀서 당한 사고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분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호나 그 후 사후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회구성원들이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농민의 한 사람 ‘B’씨의 죽음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그 후 책임져야 할 경찰까지 그 책임소재를 엄히 물었다고 한다.

동일하게 자기주장을 하다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 제지하다가 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평하게 사후처리가 되거나 사회구성원을 한 사람, 한 사람 제대로 섬기는 공복이라면 공복들이 자기들의 이상이나 주장과 관점으로 섬기려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인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공복이 아니다. 아직 예방주사 맞을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고 외치며 예방주사 맞기를 거부하던 소년 같은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목적으로 공무집행자가 되었다.

스스로 공복의 진지한 자리를 양보함이 어떨까?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다. 다만 한 사람만 섬기는 대통령이고, 나머지는 섬김을 받아야 하는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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