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오늘을 관계 상실의 시대라고 이름해도 무관할 것 같다. 인간의 관계 중에 가장 필연적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서구 사회에서 인권의 옹호정신에 의거하여 어린이 보호를 하기 위한 조치로 체벌하는 부모를 경찰에 신고하는 제도가 정착한지 오래이다. 이미 우리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 큰 반향은 없는 것 같다. 체벌을 윤리로 논하기 전 사랑하면 온전하고, 바르게 세우고 싶다. 그 열정이 가끔은 체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관심의 행동이 자연스레 나온다. 이것도 행동한 자 중심이 아니라 그 행동의 대상자의 판단에 의해 범죄 여부가 결정된다.

인생은 남남이 더불어 산다. 다른 성(異姓)이 서로 사랑을 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게 된다. 사랑함의 관계성을 물리적인 잣대로 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우 주관적이고, 감성적이며,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사람마다 감성의 지수가 달라서 감성의 지수가 높은 사람, 먼저 감정적 표현을 빠르게 하는 수밖에 없고, 능동적이고, 선재적이며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순수한 행동은 받아드리는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며, 이 또한 범죄까지 이르게 된다.

이보다 심각한 인간의 근본 관계인 결혼의 기피 현상이다. 약 반 정도가 결혼은 필수적이지 않고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녀 생산 역시 저조하여 가정 공동체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회적인 환경도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 주관적으로 취합한 정보이지만 지금 사법부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대인기피증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특별한 관계가 아닌데도 재판과 연관하여 오해 받을까 하는 우려에서 지나치게 대인관계를 기피한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소위 김영란 법이란 법이 있다. 문제를 제기하지 아니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감정적인 관계로 발전하면 언제나 중대한 범죄행위가 되고 보니 사례한다던가 감사한다던가 하는 한국적 정표(情表)는 이젠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함께 더불어 일하던 사람들과 식사와 술을 나누며, 서로가 터놓고 나누는 대화에서 공동체의 확인과 서로의 협력과 인격적 교재가 이루어지는 소위 회식 분위기에서 가장 위태로운 것이 성(性)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판단하는 피해의식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발전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라는 말 자체 안에 관계적 존재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우리’라는 말이 이젠 퇴색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간접적이지만 SNS라든지, 카톡이라든지, 페이스북이라든지 IT매체를 이용한 실체 없는 관계는 활발하다. 그러나 인격 대 인격의 만남과 교재, 그리고 이로 인한 사랑과 정이 조성되므로 말미암아 극진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위로와 격려, 나아가서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요체가 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허전해 한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많아진다. 고독해진다. 대화의 부족으로 오해가 분노로 발달되어 사회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는 은둔의 문화라고 일찍이 서구 문화 인류학자들이 말했듯이 이런 추세로 가다보면 우리의 특성인 은둔의 개인주의도 급속히 발전해 갈 확률이 높다.

여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삭막해져가고 자기 위주의 판단으로 행동하다 보면 우리 공동체의 이(利)인지 해(害)인지 모를 행동을 우발적으로 자행하는 소위 자폭 같은 사건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젠 지하철에서, 상가에서, 거리에서 눈 둘 곳이 없다. 쉽게 아무에게나 말문을 열기도 어렵다.

이성간에는 어떤 말을 해서 기분을 좋게 만들까? 뾰족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열었던 입을 닫아버리고, 시선마저 아래로 향하여 걸어야 할 때가 많다. 이 어색한 환경을 극복하는 비상수단으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지하철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같은 풍경이다.

식당에 식사시간에도 식탁의 음식을 먹으면서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기계인 장치에 입력된 데이터를 자기 본위로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숱한 정보를 자기 뜻대로 취하고 버리며, 스마트폰과 사귀곤 한다. 이러한 인격과 그것(정보매체)와의 관계는 깊어질수록 마치 도회에서 군중사회에 자신이 있으나 고도(孤島)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해(人海)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섬이 자화상이라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자기 부정의 늪으로 빠져가는 것이다. 자존심도 무너지고, 자기 절대성도 상실되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우주 산업에 올인하여 우주로 나아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체인 인간성이 상실되면 무엇을 얻었다고 해도 아무 효용성이나 가치가 있을까?

옛 원시인들처럼 자기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오늘의 인간군(人間群)들을 보며 지구촌의 몰락은 인간관계 단절에 의한 인간성 몰락이 가장 큰 위기를 가져온다고 예상한다.
사람의 ‘人’를 보라 서로 관계할 때 사람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정(情)의 문화로 꽃피워야 한다. ‘우리’로 결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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