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제국이라 하면 왕의 통치를 떠올릴 수 있다. 왕은 고대사회에서 신이다. 신의 뜻은 계시이다. 계시는 복종하면 복이 있고, 불복종하면 저주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체제 안에서는 한 사람만 사람이다. 그 이하 모든 사람은 신하이거나 노예이다.

기독교 경전 성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라는 책이다. 이집트의 삼각형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시절 파라오(라암세스 2세로 추정)는 신이었다. 

피라미드가 상징하듯 가장 높은 삼각형 꼭짓점 가장자리가 파라오의 자리이다. 그 이하는 모두 노예들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만 인간이 사는 사회이다.

이러한 질서 앞에 한 사람 모세가 등장한다. 모세는 젊은 시절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랐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다. 히브리 소수민족이 노동과 학대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간역자를 죽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지명수배자가 되어 탈주를 했다.

그 이후 40년 만에 80세의 노인이 되어 파라오 앞에 섰다. ‘나의 동족을 해방시켜 주라.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그는 단순히 이 말을 사람의 권위로 말하지 아니하였다. 히브리인의 신 야훼의 계시라고 했다. 사람이 신의 반열에 선 권위와 신으로서의 권위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파라오는 반대했다.

그 이후 10가지 재앙이 이집트에 내렸다. 그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장자가 모두 죽었다. 할 수 없이 파라오는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자기들의 고향으로 보내기로 한다. 소수민족 60만에게 대제국의 왕 파라오가 자유를 주게 된다.

이 역사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의 투쟁의 힘이 신앙의 힘이었다. 모세가 떨기나무 곁으로 왔다. 떨기나무에 불이 타고 있었다. 나무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나무에 불이 붙어 불이 타는데 어째서 나무가 사그라들지 않는가? 그리고 불만 타는가?

그 때, 불에서 소리가 났다. ‘가까이 오지 말라. 여기는 거룩한 땅이라 신을 벗어라.’라고 했다. 그 때, 모세가 물었다. ‘당신은 뉘십니까?’ 신은 말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that I am) 나는 자유자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부르짖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들었다. 이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모세가 들은 말 ‘자유’이다. ‘자유’가 사람이 사는 질서임을 그 때, 깨달았다. 그는 동족을 향하였다. 그리고 동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오게 된다.

우리의 이웃 중에 제국의 왕이 있다. 그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 땅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를 찾아 백만도 넘는 자들이 남한으로 탈북을 하여 귀순했다. 자유 없는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회이다.

그런데도 그는 체제를 계속 유지해주기를 바라면서 핵을 가지고 여러 가지 유익을 얻는 외교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갑갑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체제가 유지되면 정치범으로서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체제를 인정해주고, 경제 발전을 보장한다면 영원히 정치범들은 자유를 찾기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지하 동굴에 갇혀서 이러한 시국 변화를 듣고 안다면 더 깊은 부자유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들임을 알고 희망마저 버러지 아니할까?

일본을 보자. 일왕이라는 허수아비 신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일왕을 신으로 모신다.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알랴마는 왕이 신으로 믿어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자신을 신민(臣民), 왕의 신하라고 자처하니 이상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동아 전쟁으로 죽은 전범들을 수호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위패를 모신 신사를 국가 우리나라 종묘쯤으로 모시고 있다. 스스로 신하가 되어 사람을 신이라 하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죽인 군인들을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는 일본 사람들은 그 정신은 무엇일까?

일왕의 정신을 이어 받아 다시 외국을 침범하고, 수탈하고, 억압하고, 짓밟고, 자유를 빼앗고, 노예를 만들 수 있었던가? 숭상하는 자는 전범들을 신으로 섬기는 신앙의 뿌리는 무엇일까? 지금 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북의 제왕도, 일본의 왕도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다.

이 두 가면극 사이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맞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선하지 않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3.1운동이 100년이 되는 지금 우리의 얼굴은 웃어야 하고, 정신은 3.1정신으로 다져져야 한다. 두 이웃의 본심(本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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