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KBS는 국영방송이다. 관제보도를 보도하는 기관이다. 어느 정권이 집권을 해도 그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왔다. 편파적 방송이라고 비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외의 여러 TV채널이 있다. 그런데 모두가 일색 관제와 동일한 보도를 한다.

어디 신선한 진실을 보도하는 뉴스를 들어보고 싶어도 찾을 길이 없다. KBS 같은 경우 도올의 입을 통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어야 한다.”고 흥분하는 것을 그대로 방영하였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심화이다.

데스크의 의도가 도올의 출연, 그리고 그의 사상과 사관(思想, 史觀)이 현 정부의 사상과 사관과 같아서 오류를 오류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제 36년간 가장 목말랐던 것이 보도였다. 일본의 전승소식만 보도하는 모든 언론들을 모두 뒤집어엎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선언 보도만이 진실한 보도였을 것이다. 이후 숨통이 터지는 뉴스들이 보도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심정이 그 당시의 선조들이 겪은 귀 막음, 눈 막음의 답답함과 심장 터짐을 겪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나 방송국에 보도 통제를 하는 관리가 파견되어 있지 않을 것인데 어쩜 모든 매체가 일색(一色)으로 방송할 수 있을까?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억측하는 것이다. 기자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사건과 그 해석을 보도하기 때문이다라고 해보아도 가능하지가 않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책임자는 노동자가 아니지 않는가? 방송국 신문사의 사주(社主)들이 현 정부가 두려워서 이렇게 자유보도가 불가능해졌는가?
이 추측 역시 젊은 개성 있는 기자들이 사주의 명령에 노예처럼 순종할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도대체 이해불가이다.

국민들 일각에서는 TV시청료를 내지 말자고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변으로 인해 사마리아 보도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소위 개인방송시대를 열었다. 들어보면 속이 시원한 보도를 한다. 그러나 믿음직스럽지가 않다. 취재진도 없이 어디서 가져오는 소식들 일방적으로 자기 사견(私見)을 보도하면 이것은 통제보도보다 못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젠 유행처럼 개인 방송이 성황리에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를 즐기는 10만을 넘는 팬을 가진 개인 방송도 있다. 개인 방송이 아무리 많아진다 해도 시스템이 없는 탓으로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 뉴스라는 시원한 한 모금의 물을 마셔볼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방황하고 있다. 사슴이 목마른 것은 사냥꾼으로 하여금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출혈은 계속되고 두려움 때문에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어 출혈은 계속 가속화 되어 되어서 결국은 탈수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나 목이 탈까? 이제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달린다. 샘이나 시내를 만나 마음껏 물을 마시고는 쓰러져 죽고 말 것이다.

지금 오늘의 국민은 엉덩이나 뒷다리에 화살을 맞고 달리는 사슴과 같다. 느닷없이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5-6년 전에 종결된 세금을 어디서 어떻게 추적했는지 다시 내라는 것이다. 앞으로는 공시지가를 공무의 펜이 가는대로 그려져 고지하겠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국고가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에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 관주도 국민연금이 된 것이다. 국민들의 은퇴 후 노후생계이다. 이 국민연금이 정치적 안목으로 관리된다면 결코 성할 수가 없다. 경제논리와 정치논리는 정반대 논리다. 그런데도 정치연금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돈으로 자신을 치는 국민 자승자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로 가려거든 헌법을 고쳐서 가든지 국가의 운영은 철저한 법치가 되어야 하는데 법은 잠재우고 정권이 범위에 군림하게 되면 모든 국민이 화살을 맞는 사슴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대화는 인격으로 하는 것이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글을 쓴 바가 있다. 인격과 말을 분리해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북녘사람들이다. 약속도 소용이 없고, 조약을 맺어도 소용이 없다. 자신들의 전략대로 선전선동해가는 집단인데 그 대상을 믿고, 휴전선의 GP의 철거, 남북경협추진, 모든 경계시설 철거 등을 행하고 있다.

철거하기는 쉬어도 다시 재건하기란 쉽지 않다.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남침 쇼를 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논조를 태극기부터 논조라고 일축을 한다. 그러나 경험세대와 미경험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인 것이다. 이론과 논리는 마치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정치세계에서는 가능하다. 사실이라든가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므로 결국은 태극기부대 논리는 극우파라고 몰아붙이고 마는 것이다. 경험세대와 미경험세대가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 서로가 소통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는데도 무시해버리니 화살을 맞은 사슴이 되어 더 날 뛰게 하는 것이다.

경제지표와 반대 정치 브리핑을 할 때도 화살을 맞는 것이다. 너무도 동떨어진 자료들 가지고 자화자찬하는 정부의 브리핑을 듣고 있으면 가슴만 답답하다. 국헌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겠다고 선서를 했지만 지금 그 선서대로 하고 있다고 보는가?

만약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이 순조롭지 못해도 남한에 군사적 행동을 통해 미국을 자극하는 외교 쇼를 할 수도 있다. 이 때, 희생되는 것은 남측뿐이다. 대한민국 전통 외교노선은 북한과 미국의 직접적 외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동맹국과의 외교를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다. 이러한 모든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시도를 보면서 국민들은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모든 것이 국민에게 화살을 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어디서 진실한 소식을 들어볼 수 있을까? TV앞에서 늘 뉴스 퀴즈 풀이에 지쳐 있는 것이 국민이며, 시청자이다. 눈멀고 귀 막힌 시대에 살게 된 것을 국민들은 한탄한다. 국민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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