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히브리어에 기념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지난 날 조상들이 경험했던 사건에 나도 참여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나’란 존재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전부터 조상들의 경험한 경험이 수천년동안 첨삭되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아도 ‘나’는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나’가 아니다. 나의 얼매인 DNA는 바로 조상들의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나를 조성한 조상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조상 중에는 존경할만한 삶을 사신 분은 계신다. 또한 그렇지 못한 조상도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조상이다.

나의 조상들의 역사는 옳다, 잘못 되었다로 비판할 수도 있지만, 조상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여 무엇이 그 원인이며 어떠한 상황이었는가를 잘 판단하여 본받을 바는 본받아야 하고, 개선할 바는 개선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상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개혁을 이룸이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정의롭다고 해석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일본의 현 정부처럼 대동아 전쟁의 전범인 조상을 신사에 모시고, 국가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그 정신을 이어 받아 조상이 저질렀던 거국적 침략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의 판단의 기준을 세계 평화 인류 공생과 번영에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며, 보편적 양심과 정통한 윤리 체계를 기준하고 판단하여 이미 지난 날 과거의 조상의 삶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는 후손이 개혁하고, 사과하며 본받을 것은 본받아 더욱 발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역사 발전에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항상 미래는 오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에 성실하면 내일엔 발전이 있다. 그러나 오늘 성실치 못하면 내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가을의 추수는 봄에 씨 뿌리는 파종에 정비례한다. 그리고 여름에 흘리는 농부의 땀의 결실인 것이다. 미래를 어렵게 예측할 것이 아니라 오늘 얼마나 정도(正道)를 걸으며 진리에 합당한 생각과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진솔하게 자기를 살피면 내일이 보인다. 이러한 개인이나 공동체는 분명히 번영과 발전된 미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청산은 자기 부정이다. 일본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은 치욕적이며, 굴욕적이고,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압제며 수탈이었다. 그러나 이 36년의 고통의 원인을 일본에게만 돌릴 수가 없다. 조선의 잘못된 국가 경영은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조선이 강대국이었으면 일본이 감히 침략할 수 있었을까? 당파 싸움과 쇄국정책에 급급했던 연고로 나라는 쇠약할 대로 쇠약한 나머지 일본에게 침략해 달라고 부탁한 모양새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잘못과 침략의 기회를 조상들의 잘못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불쾌한 일이지만 남과 북이 나뉘어져서 견딜 수 없는 분단의 아픔과 고난을 당하고 있다. 이 또한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경험을 현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만이라도 세계 10대의 교역국가가 되고, GDP 삼만불시대를 향유하게 된 원인도 남북이 경쟁적 관계에서 동기유발이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의 후손에게 분단을 물려주지 말아야 할 과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일이 국시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통일에만 집념하다 보면 국제사회와의 경쟁에서 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북한의 동족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경제를 하향화하여 동등한 경제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상론도 좋다.

그러나 문명의 추락과 경제의 하향적응이란 견디기 힘든 연단이다. 과연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국민은 얼마나 될까? 지도자의 이상과 국민의 정서가 지나치게 멀어지면 리더십이 무너진다. 리더십이 무너지면 통치력이 상실된 국가 공동체가 된다. 선장 없는 항해를 하다보면 표류 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나로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어두운 역사를 산 조상이든 밝은 역사를 산 조상이든 그들로 인하여 조성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지난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비판할 때 지금의 사상과 가치관으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모든 지난날의 역사의 현실을 이해하며, 이러한 역사를 수용하고, 개과천선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를 꾀하는 것이 조국 미래발전에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옳다. 타자는 모두 ‘악’이다라는 오만으로 정죄하고, 무시한다면 ‘나’ 자신을 학대 하는 것과 같아 동일한 조상을 모시는 한민족으로 우울해지고 불행감이 팽배해질 것이다. 매일 뉴스마다 비판하고, 구속하고, 감금되는 모습을 보며 왠지 우울하다. 그리고 불행스럽다.

원인모를 분명치 않는 박탈감과 침울한 감정이 된다. 내 부모, 내 할아버지, 내 조상의 것은 모두 히브리식의 기념하자. 단의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나도 그 사건에 참여했습니다. 조상이 죄를 범할 때, 나도 함께 참여했습니다라고 한다면 나의 참회와 개선으로 보다 나은 조국의 번영을 이룰 수 있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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