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역사적 사실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지식은 다를 수 있다. 북침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남침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정보를 받아드리느냐에 따라 그의 지식이 되고, 그의 지식과 사건이 일치될 때,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아는 지식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지하다. 자기의 지식과 사실이 일치하는가를 객관적으로 검증을 할 수 있을 때, 자기 지식에 대한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이며, 진실을 얻었으므로 유식한 것이다.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반응이 상존하고 있다. 또한 믿는 사람도 있고, 불신하는 사람도 있다. 5.18사건도 그렇다. 민주항쟁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이해가 다른 이유는 자기의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

집권을 누가 하든지 집권하는 자의 뜻에 반하는 뜻이 있으면 법리적으로 항의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는가 하면 사법부가 집권자의 시녀가 되었을 때는 물리적 집단적 방법으로 개선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다. 두 관점이 충돌하지만 한쪽은 절대윤리이고, 한쪽은 상황 윤리이다. 상황 윤리가 특별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으며, 절대 윤리 역시 매사에 적용할 수는 없다. 평가에 있어서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사실을 진실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이 시대를 정보시대라고 한다. 정보의 바다에 빠져서 살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보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이나 실상은 그 전달하는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정할 뿐 정보가 사실과 거리가 먼 경우가 허다하다. 왜 미국은 북핵을 전면폐기하려고 하는지, 이란의 핵은 왜 폐기하려고 하는지, 왜 현 정부가 전 정권자들을 적폐라고 하는지, 왜 핵발전을 중단시켰는지, 사법부의 진정한 적폐는 무엇인지, 왜 소득주도 성장을 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매체가 전하고 해석하는 것만 접한다. 사건과 정보와는 멀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과 우리의 귀와 눈은 전해주는 매체의 입에 나의 귀가 종속되어 있고, 매체의 표현이 나의 눈에 노예가 되고 말았다. 보고 듣는 대로 믿어야 하는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어버렸다. 즉 남이 전하는 정보를 지식을 삼을 뿐, 나의 눈과 나의 귀가 직접 사실을 보고, 듣고, 판단하는 지식에는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100년의 기념식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다. 국민도 없고, 주권도 없다. 더욱이 국토도 없다. 중국 남의 나라 땅에서 외교권도 없는 정부이고, 국민은 먼 조국에 있다. 이러한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0년이 되어 기념식을 하였다.

지금도 많은 역사 학자들이 임시정부가 어떠했는지 전달해주므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하고 있는 지식마저도 온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들의 눈부신 조국 독립을 위한 의거는 숭상하고 존경한다. 김구 선생의 겨레 사랑 역시 존귀하다. 그러나 어떤 폭력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절대 윤리 잣대로 본다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군사독재 시절 북풍(北風)이란 사건을 경험했다. 북한에서 연평도로 포을 가한다. 서해안에 북한 군인이 침범한다. 대대적 간첩단이 내려왔다라고 해서 북한의 도발 사건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자작극이 많았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자작극을 벌이고 정권을 유지하고, 국민의 관심을 모으려고 하는 숱한 거짓 뉴스에 이골이 난 국민들은 아마 실제 한국정쟁이 다시 발발하여도 어느 누구하나 걱정도, 놀라지도 아니할 것이다. 서울에 포격이 날라와도 공장 폭발 사고 정도로 생각할까 두렵다.

집권자들은 습관적으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성공적이라고 홍보를 하고, 국방이 이상 없다고 한다. 정치가 시작된 이래 이 정보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집권자들의 정보는 이제 믿을 사람이 없다. 시골의 순진한 농민들부터 오랫동안 당하여온 국기 시책을 믿지 않는다. 정부의 시책에 따르면 망하고, 반대로 농사하면 풍요해 진다고 믿고 있다. 그래도 또 따른다. 그리고 다시 후회한다.

어디서 진실을 찾을까? 진실에 목말라 하고 있다. 오히려 이제는 공중파 매체, 지상파 매체에 불신하고 있다. 유투브라든지 SNS 정보에서 진실을  얻고자 한다. 이러한 매체는 지나친 주관적 해석이라 매우 불완전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내지는 검증되지 않는 정보가 오히려 신실하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가면 갈수록 정보 불신 증후군이 생겨 국가라는 공동체, 그리고 세계라는 공동체를 리드 불가한 시대가 올까 두렵다. 진실은 사건과 지식이 동일한 때라고 전제한다면 인류의 역사와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위하고 국민들의 평안을 위하는 길은 비난을 받고, 비판을 받고, 집권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리더가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국민을 섬기는 분이 실제 국민의 생활과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을 가지고 오히려 국민을 설득하려고 한다든가? 장기 집권을 위한 방법으로 미래가 없는 오늘의 가려운 곳을 시원케 해주는 정책을 쓴다면 망국의 원흉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공복은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주인인 국민의 안녕과 복지, 그리고 번영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리더가 바른 리더가 아닐까?

정보정치, 회유 정치, 눈치 정치, 직업인으로서 정치인, 정치 공학의 달인으로서의 정치, 설득의 장인으로서의 리더는 국민을 우민으로 만들고, 소경이 소경을 이끌고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진실이 강처럼 흐르고, 사실이 바람처럼 부는 믿음의 언덕에 올라서서 희망의 태양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이 국민의 여망이요, 바람이다. 얼마간의 배고픔도 참을 수 있다. 얼마간의 진통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일이 밝다면, 내일이 행복할 수 있다는 진실된 나침반을 국민들은 진심으로 소원하고 있다. 진실을 알아 서로 믿고 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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