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인류를 현재 문화와 문명에서 원시시대로 되돌린다고 하자. 정글에서 살던 원시 인간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자. 그런다고 공평한 정글이 이루어질까?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사람마다 건강의 차이가 있고, 체격에도 차이가 있고, 삶에 대한 애착에도 차이가 있다. 인간의 원초적 사회에도 사람마다의 차이, 가족과의 차이, 그리고 그룹 간의 차이는 생겨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 차이를 가진 자에게 원인을 찾고, 가진 자들을 죄악시하고, 가진 자들을 증오하며 몰락시킨 것이 공산주의이다. 소위 부르주아의 비판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공평한 시대가 왔는가? 그렇지 않다. 구소련이 대표적 역사를 살아왔다. 공산주의 사회가 더 심각한 차이를 만들었다.

권력 가진 자가 서열 우위이다. 그리고 무력이다. 그 다음은 공산주의를 맹신하고, 광분하는 자가 그 다음을 얻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사회 북한도 여실히 이를 증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백두혈통이라고 한다. 생리학적으로 다른 인민과 DNA의 무엇이 다른지 모른다. 상식으로 보아도 다를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가문이 신(神)의 경지에 있다. 오죽하면 북한체제를 종교라고 표현하겠는가?

인간이 사는 세상은 완전히 공평한 분배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다만 칼 막스의 이상일 뿐이다. 이상은 허구의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는 사회과학으로 둔갑하는 사례가 흔히 있다. 사람의 두뇌부터 차이가 있다. 굳이 IQ를 말하지 아니하여도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차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주어진 분깃으로 볼 수는 없을까?

건강문제도 그렇다. 저마다 유전적 병의 원인이 많다. 부모의 병력을 의사는 항상 문진표를 통해서 채집한다. 사람의 체격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며, 취미와 소질이 각각 다르다. 이 다름을 인정할 때, 그 공동체는 발전하고, 더욱 다양한 재미와 삶의 활력을 누릴 수가 있다. 음감(音感)중에 선천적 절대음감(音感)을 타고난 사람도 있다. 한 번들은 음악을 악보에 옮긴다. 스스로 악상이 떠올라 오선지에 명품 소리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영재가 태어나면 영재교육을 받도록 해야 하고,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학자로 길러주어야 하며, 다양한 방면의 인재를 그의 지식이나 재질을 길러주는 사회가 될 때, 차이를 인정하는 공평한 사회가 이루어진다.

U-20 월드컵에서 역사적으로 처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사회가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서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계란을 던지는 세계인은 아무도 없다. 81세된 노인이 하루에 홀인원을 두 번 했다고 그를 죄인시 할 수 없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월드컵에서 준우승하므로서 국민 전체가 마치 세계 이등쯤 되는 능력이 있지 않나 착각을 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착각일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차이는 다 인정한다. 대학의 입학에도 마찬가지이며, 회사의 취업에도 동일하다. 주식투자를 한다고 해도 정보가 정확한 사람이 주식에서 유리하다. 우월로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분깃으로 보고 모두가 차이를 인정해주고, 이웃이 우수하면 축하해주고, 응원하며 격려하면서 사는 것이 평등한 사회가 아닐까?

‘자본주의와 기독교윤리’을 쓴 찰스웨브는 기독교 윤리 없는 자본주의를 경계했던 것이다. 분깃도 인정하자. 능력도 인정하자. 그리고 차이도 인정하자. 그러나 자신만을 위하여 차이점을 사용하거나 횡포를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를 위한 자기 분깃, 또한 더불어를 위한 자기의 소유의 관리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차이들과 공존하고, 차이가 서로 돕는 윤리만 세워진다면 차이가 있는 세상이 가장 훌륭한 이상의 세계가 될 것이다.

갑자기 다니던 학교가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바뀐다고 하자. 자사고를 다니는 학생이나 그 학부모는 얼마나 실망을 할까? 자사고를 일반고등학교로 만드는 것은 입시경쟁을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큰 착각이다. 부모가 능력이 있고, 자녀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가정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추구하는 학력을 획득하고 볼 것이다. 결국은 사교육만 배불리는 꼴이 된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고 했다.

년 이자를 80%, 100%를 받던 악성 지하 금융을 양성화하여 년 20%로 내리자 다시 지하로 숨고 말았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모든 학교를 놀이하는 곳으로 만든 것을 전국민이 원한다면 모르겠다. 학교가 정보를 공급하는 자와 정보를 사는 자가 이루는 시장판이라면 질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한 필사적 경쟁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공산주의가 본능을 인정하는 자본주의에 맞서서 아무리 이성 중심의 학습을 해보아도 결국은 자본주의에게 패배를 하고 말았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능력자는 무능자로 만들고 무능자는 무능자로 유지하게 하는 사회는 멀지 않아 몰락하고 말 것이다. 공산주의가 걸었던 길을 걸어가는 행보는 그 종말은 멸망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차이를 인정하고, 100대 대학이든지, 아이비리그라고 하든지, 뭐라고 부르든지, 소위 명문학교가 있고, 그렇지 않는 학교가 공존하는 것이 평등이다. 실력 있는 자가 실력을 더욱 증진 시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유익을 끼친다면 구성원 모두가 유익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유길준이란 우리의 선조는 미국에서 40代에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미국의 학문은 우리가 닦은 학문과 다르며, 선진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세가 나라를 발전시키고, 속한 공동체가 더욱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이 잘되면 배 아픈 우리의 근성을 버려야 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출세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와 친근하고 가까운 사람이 출세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자기도 불행하고, 이웃도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이나는 자들이 하나 되게 하는 바른 도덕성을 길러주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차이는 다양성으로 볼수록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섯 손가락의 길이가 차이가 난다 해서 긴 손가락을 자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