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예수께서 가장 많은 비판을 하신 사람들은 위선자들이었다. 예수 당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위선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 무덤에는 시신이 묻혀 있다. 시신은 썩는다. 그 무덤의 겉을 아무리 하얀색을 칠하여 깨끗한 척해도 썩는 냄새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진동한다. 어느 여름날 문이란 문은 다 닫아놓고 시신을 염습해 본일이 있다.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다. 후각이 정상임이 원망스러웠다. 팔레스타인의 무덤을 알아야 한다. 동굴을 파고 그 안 돌판 위에 시신을 안치한다. 그러니 부패한 냄새가 무덤 밖으로 배어 나올 수밖에 없다. 위선은 처음부터 위선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사가 처음에는 순수하고, 진솔하여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압제당하던 시절, 가장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분들이 성적 노예로 끌려갔던 위안부 어르신들이다. 그 당시는 젊고 아리따운 소녀들이었다. 논하고 싶지 않은 극단적 비극이었다. 이 들의 인권회복과 자그마한 보상이라도 해 드려야 한다고 시작했던 NGO들은 천사들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처음 동기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반일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 이분들의 동상을 세우고, 일본의 만행과 비도덕적 전범들임을 알리고 싶은 의욕이 더 커져갔던 것이다. 왜 새삼스럽게 반일을 외치는가? 태평양 벨트를 끊고 싶어서다. 반미, 그리고 미군 철수 그 다음은 조인민공 통일과업의 완수를 위한 수단으로서 휴머니즘의 탈을 쓴 것이다. 그 증거가 있다.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가 어르신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엉뚱한 탈북민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하는 공작처가 되었던 사실이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사상이 골수에 박힌 사람의 휴머니즘적(인도주의) 행위는 사상적 행위의 탈에 불과한 것이다. 스님이 고아를 데려와 키우면 동자승이 될 확률이 높고, 목사가 고아를 입양하여 키우면 크리스천이 될 확률이 높다. 양육 받은 자가 빚진 자가 되듯이 위안부 할머니들은 또 다른 얼굴의 위안부가 되었다. 1960년대 말 기독교 신학 중 민중 신학이라는 것이 있다. 민중 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이 유입되어 토착화된 신학이다. 이 신학의 핵심은 누가 민중이냐라는 것이다. ‘익명의 크리스천(anonymous christians)’ 비록 예수는 믿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예수의 사상을 본받아 가난한 자, 약자의 선한 이웃을 민중이라고 했다. 이 민중 신학에 칼 막스(Karl Marx)의 유물론(唯物論)을 입히면 이상한 통일 논리가 성립된다.

사도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나약한 인간들을 위해 죽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하여 희생해야 한다 했다.(로마서15장) 이 논리로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 문화적 우위에 있는 대한민국이 조인민공에게 정복당하여야 민중의 뜻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약자인 프롤레타리아가 국가의 주도권을 잡고, 부르주아를 멸망시키는 조인민공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통일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통일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자본주의 맹주인 미국과 국교를 청산하고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시키고, 태평양 벨트인 일본은 배일하고, 조인민공과 결속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의 치부를 들추어 일본의 국가 국격을 훼손하고, 일본의 만행을 세계적으로 알리어 국제사회가 공감대를 이루고 일본을 압박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상금 명목으로 금전을 받아내어 조인민공의 통일전선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위안부 할머니가 모두 별세를 하시더라도 이 과업을 지속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해서 자금을 축적하고 통일의 그 날까지 계속 행동하는 것이 Y국회의원 당선자의 의식이자 철학이다. 일본의 외교라인은 위안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정의연이 무섭다고 했다. 통일과업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수요집회는 기독교 여성연합회에서 시작했다. 수요일 집회는 수요일은 기독교도들의 예배의 날이다. Y국회의원 당선자는 신학대학교 출신이다. 한때 전도사로 일한 바도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사업을 인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현 삶의 자리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혜택은 빠짐없이 다 누렸다. 소위 강남 좌파의 탈 쓴 이들과 동일한 맥락이다. 결국 반미를 외치면서 자녀는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탈춤이다. 그는 자신이 인도주의적인 행위의 탈을 쓴 것은 그의 신학과 신앙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변신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은 계급 투쟁이다.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 지극히 선한척하며 지독한 이기주의 집단,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했듯이 30년간 이용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진면목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선전, 선동에 능한 공산주의에 사상교육을 받아 모금에도 유능하고, 혁명 투쟁을 배워 거짓선전에도 빼어난 모습을 보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탈을 쓴 자들의 춤에 취해 4.15 총선에서 180석을 내어주어 탈꾼들의 나라가 되었다. 탈춤 추는 자는 모두 탈과 다른 자기가 있다. 탈 속 민낯은 탈과 정반대이다. 이번 Y의 사건은 탈이 탈(고장)이 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탈춤 판이다. 원전 폐기도 탈춤이다. 혹시 중국의 동부 연안에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북한으로 연결하여 남한으로 전력을 공급받는 전략은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코로나 재난 지원금 살포도 탈춤이다. 그들의 은밀한 곳에는 그들만의 음흉한 미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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