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진흙을 잘 말려서 고운가루로 만든다. 흙이 부수임을 당하든지 짓깨든지 통증이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사람에 비유하면 그 고통은 아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에 의해서 물리적인 힘이 가중되어 자기의 형태가 부서진다는 것은 큰 아픔인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나 단체가 단순히 부서진다거나 혹 해체된다고 치자 아픔에 머물지 않는다. 죽음이다. 한 공동체가 해체된다는 것은 단순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 아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 과정이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첫 관문이다.

 

부셔지지 않고는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 질 수가 없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주께로 오는 사람들에게 꼭 한마디 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예수님도 자기의 작품을 만들려면 우선 깨어져야 가능했던 모양이다. 자기가 살아 있어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게 깨어진 가루들을 체로 치는 작업이 시작된다. 작가가 요구하는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규격에 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의 구멍은 작고 촘촘해 그 구멍(규격)을 빠져나오기란 그리 쉽지 않다. 내가 새로운 것이 되자면 상대가 말한 요구에 순응되어 질 때 가능하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만들기에 알맞은 입자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의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먼지 같은 것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글번역은 티끌이다.

 

그 다음 과정은 침전이다. 물속에 흙을 담가 놓는다. 그렇게 침전시키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흙이 물을 머금고 살아야 한다. 물이 흙속에 잠긴 체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물속에 흙이 담가져 있다. 천지가 개벽한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적응 못하는 것이 새로운 질서이다.


“형제를 용서하라,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나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라는 준엄한 새로운 질서의 공표, 그것도 형제도 아니다, 원수이다. 원수를 용서하되 무한으로 끝까지 용서하라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서가 어디에 있는가?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가 함께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았다. 그 즉시 이런 마음이 생겼다. 교황의 마음과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을까? 과연 두 나라의 평화를 약속할 수 있을까? 교황 앞에 두 사람 철천지원수들이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 제스처 일뿐, 교황의 수고로움만 보일 뿐이었다.

 

이 예측은 드디어 전면전을 방문케 하는 물리적 충동으로 지금 번지고 있다. 아직 여기는 새 질서가 통하지 않는다. “용서”란 정의를 쏟을 때 복수시키는 것을 용서쯤으로 정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새 질서에 침전된 흙들은 어느 날 신비로운 작가의 손에 없어진다. 그리고 어지럽게 돌고 있는 물레의 가슴에 안긴다. 돈다. 돌고 돈다. 그리고 자기는 자신의 뜻을, 돌고 있는 새로운 도찰의 형체 속에서, 온기와 기운과 정신과 아름다움을 불어 넣고 있다.

 

작가의 손가락이 닿을 듯 닫지 않을 듯하다가 갑자기 깊이 몸의 폐부를 짓누르며 골을 파고 돌리고 한다. 돌고, 돌고 또 돌고 마치 이 지구촌에 사는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서 지구가 돌고, 달이 돌고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의 수많은 별들이 또 돌고 돌아,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주는 것처럼 그렇게 돌고 있는 사이에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어 우뚝 서 지는 것이다.


도는 힘이 존재를 만든다. 창세기 1장 1절에 창조이야기가 있다. 성경은 수면에 운행하시니 라고 되어 있다. 이 수면의 운행은 피조물을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부화하듯 그렇게 창조했다는 뜻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부화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가만히 암탉이 앉아있는 것 같지만. 두 발로 연시 달걀을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뉴월 암탉이 병아리을 품다가 질식하고 지쳐서 죽는 것도 보았다. 가만히 있지 않아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그러게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이다.

 

이젠 작가의 뜻대로 한 존재(작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슴에 않고 들어간다. 화구, 요 안이다. 앞으로 천도도 넘게 불을 지필 것이다. 천도면 남아나는 것이 없다. 불 앞에 남아날까?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요에 넣고, 천도씨로 불을 지핀다. 며칠 밤낮을 그렇게 굽고, 또 굽고 또 굽는다. 굽지 않으면 도자기가 안된다.

 

도자기를 굽는 동안 도자기 작가가 만들어 준 그 형체를 놓쳐버리면 반드시 던짐을 받고 깨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는 도자기가 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지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인간이 되자면 이런 과정을 겪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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