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로마에서는 고민스러운 문제가 있었다. 노예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너무 지나치게 매질을 하면 번뜩거리는 눈과 저항하려는 듯 한 숨소리가 주인에게 부담이 되었다. 그런다고 가볍게 다루면 일을 게을리 하여 도무지 농사가 제대로 경작되지 않는다. 수시로 노예의 가정을 엿보면 무슨 수작을 하는지 그들끼리 항상 저항하는 듯 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실제 어느 노예는 주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도 생겼다. 이런 이야기가 노예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노예 주인들은 비밀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노예 가정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이 노예들의 대화를 엿들어 본즉 무슨 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귀를 의심케 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 우리 주인이 나를 채찍질하시는데 그전 보다 훨씬 덜 아픕니다. 이제 주인님의 건강이 쇠약해진 것만 같습니다. 주인님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건강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해할 수 없었다. 노예가 저런 기도를 할 수도 없고, 할리도 없다.

 

자기들을 착취하는 주인을 위하는 기도를 노예가 어찌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 생각되어 노예들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어느 날 저녁 등불을 들고 노예 부부가 외출을 했다. 뒤를 밟아 보았다. 노예 부부는 으슥한 골목길을 몇 번 돌아가더니 후미진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인은 그 지하실로 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로마사회가 박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비밀장소였다. 주인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모임에 참여해 보았다.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에 못 박혀 매달려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창으로 허리를 찌르고, 손과 발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죄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은 왕중왕이십니다. 왕중왕의 마음과 삶은 남의 종이 되어 섬기며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훈계를 하는 것이다.

 

이 훈계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 자기의 종이 자기 주인의 건강을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은 만나는 노예의 주인마다, 로마 시민마다 종들을 그리스도교를 믿게 하라고 권면하게 되었다. 로마 시민이 가장 고민스러운 노예관리 문제가 해결된다고 자랑하였다.


현대는 노예제도가 없다. 노예도, 주인도 없다. 그러나 자원한 노예들은 많다. 바로 공복(公僕) 공무원인 것이다. 공무원은 스스로 공복이 되기 위해서 몇 백대의 일의 시험까지 치르면서 공복이 된다. 공복들은 말한다. ‘우리는 철밥통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의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을 주로 모시는 의무가 아닌가? 그런데 자원하여 종 된 사람들이 자기를 먼저 사랑할 수가 있을까? 주인인 국민을 사랑하는 일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의 최고 즐거움이란, 국민을 최선을 다하여 섬기므로 말미암아 국민이 만족하고, 기뻐할 때 가장 삶의 보람을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자기를 위하고, 자기 편함을 도모하며, 자기 소유를 많게 하는데 사용하기를 즐겨한다고 한다면, 공복(公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종이 관료의식에 빠지면 국민은 더 이상 주가 아니라 자신이 주가 되고, 국민은 종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불행스런 질서가 온 국민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공무원의 진정한 기쁨과 보람은 국민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희생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논리는 이상은 될 수 있으나 현실에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한 민주주의는 결코 꽃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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