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성서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양들을 사랑한다는 뜻에서 사용한 비유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우리에 있다. 그런데 한 마리 양이 없어졌다. 이 때, 목자는 안전한 우리 안에 있는 양 아흔 아홉은 그냥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닌다.

이리에게 물려갔는지 아니면 계곡에 떨어졌는지,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방을 헤맨다. 드디어 잃어버린 양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계곡에 떨어져 있다. 목자의 긴 지팡이를 거꾸로 잡고, 양을 지팡이에 달아 올린다. 드디어 찾았다.

기쁜 마음으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선한 목자의 마음에는 공리주의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이리와 야수에게 잡혀갔다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가 양 우리 안에 이리가 침범하여 더 많은 양에게 해를 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선한 목자가 아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다가 더 많은 양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말이다.

‘차라리 잃은 것은 잃고, 있는 것을 잘 보존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선한 목자라면 잃어버린 한 마리와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안전하고, 건강하다. 그러나 잃어버린 양은 위협받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기에 약한 자, 위험에 처하여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는 양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감성에 치우쳐서 찾아 나섰다면, 이 선한 목자는 선한 목자라 할 수 없다.

건강하고, 안전한 아흔 아홉에게는 덜 관심을 갖는 편애하는 목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하고, 안전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나 모두를 균등하게 사랑하므로 지금 목자의 보살핌이 필요로 하는 양이 발생하였기에 그에게 목자가 하여야 할 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선한 목자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국민 중에 어떤 계층은 보살핌이 꼭 필요하다. 사안을 잘 파악하여 먼저 할 일을 먼저하고, 나중할 일을 나중 하는 것이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일의 순서를 잘 알고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손꼽고 있다. 지금 소수의 인권에 관심을 쏟을 정도의 성숙한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그래서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건강하고, 안정된 사람들에 비해 소외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소수를 위한 법률을 만들어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은 찬성을 한다. 그러나 이 소수가 다수와 함께 두면 소수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전체에 미칠 영향력을 계산하지 않은 채 소수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한다면, 이 소수가 보편사회에 미칠 영향을 간과 할 수 없다. 소수의 특성이자 그 비보편성은 그 독소가 인류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 같다.

우선 인간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성의 특성을 단순한 육체적인 것으로만 볼 가능성이 크다. 성이란, 인격적인 차이이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생리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녀 생산에서 양육, 그리고 출가하여 독립된 가정을 이루기까지 분명 두 인격이 한 인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 다르고, 아버지의 역할이 다르다. 이는 오늘 이 세대에 인간들이 건강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을 이루는 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리적인 차이만으로 성의 차이로 보고 용납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인격에서 본능 중심의 사람으로 퇴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가장 큰 인류의 위협은 너와 나와의 인간관계에서 나와 그것(문명의 산물, 로봇)과의 관계로 급속도로 옮겨가는 것이다.

앞으로 로봇과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그렇게 되면 될수록 인간과 인간관계는 파괴가 되고, 인격과 인격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도덕적 사회를 지향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인간존중이란 가치 아래 비보편화하는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 같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목자가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불행이 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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