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지구 온난화는 기온을 오르게 하고, 수면도 높아지게 한다. 이로 인하여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화석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경제대국이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고 교칙을 하셨다고 한다.

물론 성장론자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분배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색을 하고 동의 할 것이다. 인류는 누구나 균등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누구나 평등하고 균등하게 나누어 오순도순 사는 사회야 말로 이상향이 일 뿐 한 번도 이루어진 일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칼 막스가 공산선언문을 내어 놓을 때,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식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선 자기가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교의 규범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자신이 변화를 받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자신의 변화는 자기의 노력으로 고행으로 참선에 몰입을 한다거나 구도의 길을 떠나 칩거하며 사회를 등지고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영혼에 임재한 상태, 이것을 변화라고 한다. 속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어진다. 나의 배고픔도 물론 해결해야 하겠지만, 남의 배고픔이 자기 배고픔보다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생산하는 것도 아니요, 노동하는 것도 아니다. 이웃의 필요와 공급을 위해서 생산하고 노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타적(利他的) 행위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상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즐거움으로 산다. 성실하고, 진실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고, 입지 아니하고 절약하고 검약하여 이웃의 극빈함을 도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요즘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자기의 재산을 사회에 모두 환원하고, 기부하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돈을 버는 즐거움보다 돈을 나누어 주고, 구제하고, 사회사업에 기부하는 즐거움 때문에 일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삶의 양식이 이 땅에서 자리 매김하면 살고 싶은 곳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다. 접근해야 할 일이지만, 분배의 당위성을 절대화하고, 강제적으로 분배를 하자는 것은 사람의 이기적인 보편성을 무시하고, 이기적인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재산의 공용화를 강행한다면 결국은 혁명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북한을 보라.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한보다 더 잘 살았다. 국가가 모든 재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함께 생산하고 골고루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새 균등분배의 책임자들의 자기의무가 권리로 변질되고 변질된 권리는 독재를 가져오고, 독재 정치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급을 만들고, 결국은 계급사회가 조성된 다음부터는 암흑사회가 되어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고기반찬에 이밥”이란 구호가 60년 넘게 외쳐지고 있고, 이러한 사회라고 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미완의 상황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걸고 균등분배의 체제를 벗어나 탈북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살 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평등하고 균등분배 하는 사회는 인간 누구나 꿈꾸는 이상주의 사회이다. 이 지구촌에 한 번도 이루어진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이룰 수 없는 영역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한 경쟁하는 자본주의를 살기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한 윤리의식 인격이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본능에 이끌려 생존경쟁에서 소유경쟁으로 정글의 먹이사슬에 얽매여 사는 동물사회 같고 질서가 자리매김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역시 살고 싶은 곳이 못되는 것이다. 살고 싶은 곳을 만드는 길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니다. 그렇다고 분배가 강제적으로라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회도 아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사는 곳, 바로 살고 싶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환경을 초월하여 마음껏 활짝 웃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자기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일게다. 네가 먼저 변화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먼저 변화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곳이 살고 싶은 곳이며, 사람의 변화가 살고 싶은 곳 만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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