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⑦

[부천신문] 위의 그림은 ‘어떤 사람이 신(神)을 향해 경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고대 이집트인의 미신과 같은 토템신앙의 극치를 드러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올바른 상형문자의 해석은 그림에 대한 이미지로써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미로써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경험 속에 길들여진 경험주의자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어떤 이미지로써 고정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단점은 사물의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게다가 경험론적 사고의 문제점은 새로움을 찾는 창조적인 사유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신은 모두 4명이다. 먼저 오지리스()신은 중간계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의 심판을, 지상계에서는 식물의 소생을 관장한다. 이지스()신은 오지리스의 부인으로써 죽은 남편의 시신을 모아 부활시켰고, 그의 자식을 보호해 주었다. 공기의 신 슈()는 생명체의 보존을 관장하며, 영적인 사회적 질서 혹은 진리로 상징된다. 창조신 아몬()은 보이지 않는 창조의 힘으로써 상징된다.

위와 같은 상징 이미지로는 하나의 일관된 관점 속에서 어떤 원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대충 어림짐작해 보면, 생명의 탄생에 관하여 말하는 것 같은데, 왜 그것이 굳이 영혼의 정화와 연관되어야 하는 걸까? 혹시 도자기 장인이 정성을 드리는 것처럼, 마음가짐이 훌륭해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하는가?

하지만 생명의 탄생은 간절한 소망 속에서 정성스럽게 합궁한다고 해서 잉태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창조란 무엇이기에 영혼을 정화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창조(creation)의 상징, 아몬(amon)을 파자(破字)하여 풀어보면, 결과(m;)를 산출하는 에너지(n;)의 능동적인 행위(a;)가 바로 창조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를 가로질러() 자신의 정당성을 보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해답의 실마리는 공기의 신 슈(Chou)에 있다.

공기의 신 슈(Chou)는 자신의 대립물 습기의 신 테프누트(Tefnout)와 분리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생명체의 건강은 차가운 것과 더운 것의 분리 작용 속에서 생체리듬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생체리듬의 불안정은 질병을 부른다. 질병은 한편으로는 정신상태의 부조화,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

이를 우주론적인 관점으로까지 확장하면, 천상의 신체도 슈(Chou)가 관장하는 에너지 운동 그 자체에서 조건화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에너지의 안정은 물과 불 사이의 안정적인 조화 속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지상의 생명체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상의 질서를 관찰함으로써 미신 따위로 사회적 혼돈을 야기하는 영혼의 방황을 정화하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래서 위의 단순한 그림은 천문, 의학, 신학의 가교 속에서 이집트 문명이 꽃 피웠음을 암시한다. 매일 반복되는 태양과 달의 순환운동 속에서 식물의 생명운동을 관찰하였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라일강의 범람이 소티스(Sotis; 천랑성, 이지스 별)의 운동과 연관되었음을 깨닫고, 물() 에너지 흐름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dogang.jeon@gmail.com>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