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사랑을 하였는데 그 사랑의 결과가 분노와 원망으로 돌아올까? 사랑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면, 이처럼 엉뚱한 결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사랑을 받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랑을 줄 때 그것이 사랑이다.

농경사회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식사시간이 되어 귀한 손자나 자녀가 밥상을 받는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갑자기 자녀의 밥을 국그릇에 다 쏟아 붓거나, 국물을 밥그릇에 쏟아 부으면서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다 먹어! 남기지 말고.”라고 하신다. 먹어도 먹어도 소화가 금방 되는 배고픈 때이다. 젊기도 하였고,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농사일은 주로 육체노동이다. 그래서 배가 차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소화가 되어 배가 고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꾹꾹 눌러주던 그 사랑이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만약 요즘 다이어트를 생명처럼 여기는 손자나 자녀에게 이런 식의 사랑을 했다가는 사랑이 아니라, 폭식을 강요한 행위가 되어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문제가 보도 된다. 사랑을 떼고 “성”을 논할 수가 없다. 사랑하매 하나가 되는 것이 “성”이다. “성”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물로서 생명을 탄생케 하는 신비한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일방적으로 행위 하는 문제가 오늘의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다. 학력도, 사회적 지위도, 나이도, 종교도, 상관없이 아직 “성”문제의 절제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 원인이다.

사람은 여타의 생명체와 달리 언제든지 생식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창조주가 배려를 했다. 그렇게 특혜를 받았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특혜가 큰 저주가 될 수가 있음을 수많은 성범죄자들을 보면서 느껴진다. 부산의 어느 여성이 외쳤듯이 과연 자기 “성”은 자기 “성”일까? 그렇지 않다. 나의 “성”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의 “성”은 남편의 것이요, 남편의 “성”은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질서를 지키지 아니하면, 우선 이 지구상에 가정은 모두 파괴될 수밖에 없다.

과거 중앙아시아 어느 국가를 방문한 일이 있다. 그 나라에서는 가정이란,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부부의 연을 맺고 자녀를 양육해가는 가정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 아닌 다른 여성과 주말여행을 떠나고, 아내는 아내대로 다른 남자를 선택하여 주말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상적이고 보편화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가정에는 이복형제와 씨가 다른 형제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흔히 보았다. 그럴 수 있겠다고 하지만, 이 독특한 문화가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괴로움과 갈등이 심하였겠는가? 생각을 해보면 굳이 이러한 덕스럽지 못한 문화는 바람직 할 수가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바랄 때, 사랑하는 사랑이 사랑이다. 원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만족하게 해 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아직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리적인 사람들이다. 인간이란 이성이 있다. 그리고 인격이 있다. 더 나아가서 정신이 있다. 어찌하여 본능의 이끌림을 받는 인간이 되어 살아가려고 할까? 인간이 사는 사회가 동물의 세계로 전락하지 아니하려면 절제된 “성”과 사랑의 올바른 나눔이 이루질 수 있도록 자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인성교육과 윤리의식의 고취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지식교육과 건강관리에는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랑 즉, 생명 소중성에 관해서, 가정에 관하여, 인성교육에는 너무나 소홀하다. 이로 인하여 오늘 우리의 자화상을 어둡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바른 사랑에서만 온다. 국민소득 향상도 좋다. 환경개선도 좋다. 문명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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