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⑯

[부천신문] 인류에게 알려진 死者의 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티벳 사자의 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집트 사자의 서이다. 전자는 죽음에 임하는 순간부터 재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정신적 변화 및 체험들을 설명하면서 사자(死者)가 자신의 근원적 마음을 깨닫고 윤회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면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눈부신 빛과 부드러운 빛의 대립구도 속에서 ‘눈부신’ 빛에 이끌려야만 윤회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불가의 五聖智(法體性智, 大圓鏡智, 平等性智, 妙觀察智, 成所作智)는 각각 푸른 빛깔, 흰 빛깔, 노란 빛깔, 붉은 빛깔, 초록 빛깔로 표현되지만 이것의 전제는 눈이 부셔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五惡(악습, 분노와 증오, 자만, 탐욕, 시샘과 질투)는 각각 흰빛, 회색빛, 푸른빛, 노란빛, 붉은 빛으로 상징되는데, 이것의 전제는 모두 눈에 부드럽게 수용되는 빛이다. 잠시 색깔의 상징을 무시하자. 실제로 불가의 도상학(圖像學)체계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왜 카지타와삼둡 라마는 ‘눈부신 빛’에 대해 ‘부드러운 빛’을 대립시켰을까? 혹시 명상수련에서 체험한 것, 즉 보다 선명한 빛깔이 더 큰 환희를 나타내는 체험을 겪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빛에 대한 분별심(分別心을) 가진 것 아닐까?

아니면, 가능성의 명계(冥界)에서는 분별심이 있어야 하고, 불가능성의 현실계에서는 분별심이 없어야 하기 때문일까? 이러한 의문을 불경스럽게 여기지 말자.

이 의문은 ‘깨달은 자의 습관적 사고도 깨달음에 속한 것인가?’라는 것을 묻기 때문이다. 만일 깨달음을 하나의 혁명으로 사고하면, 혁명이 한 번만  일어나야 하는가, 아니면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영구혁명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신비화시키지도 신성화시키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고 산다. 왜냐하면 상념 혹은 관념과 현실의 대립이 깨달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 깨달았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관념과 현실을 대립시켰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대립의 강도가 큰 사람이 반대로 작은 사람보다 관념과 현실 사이를 더 잘 조화롭게 만든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논리적 혹은 인식론적(épistémè) 차원이 아닌 실천론적(praxis)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그러면 깨달음에 대한 정도 차이는 인식의 각성을 행동의 각성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정도 차이로 이해하면 된다.

과연 빛의 색깔이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빛의 색깔 구분은 인도 요가(yoga)에서 말하는 몸의 에너지 센터인 차크라(chakra)를 구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자의 사후세계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다는 가설은 왠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물리학에서는 빛의 스펙트럼(spectrum)은 물질의 성질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관념의 의식 혹은 의식의 어떤 상태는 육체의 특정 기관 혹은 에너지 센터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마음이 아프면 심장이 터질 만큼 아픈 것처럼.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적, 과학적 사실은 역으로 사후세계에 망자의 의식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그림처럼 사자(死者)의 심장 무게로 영혼의 상태를 평가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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