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보고 싶은 얼굴은 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보고 싶은 얼굴이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일수도,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여인이 있었다. 코는 주먹코이다. 딸기코라고도 한다. 얼굴은 천연두를 앓아 곰보이다. 나이는 16살인데 흰머리가 났다. 가슴과 등이 튀어나와 곱추이다. 허리를 펴고 다니지 못한다. 키는 140cm쯤이나 될까? 그러나 언제나 웃는다.

그 이름까지 예쁘지 않다. ‘태놈’이다. 남자이름 같다. 가을걷이가 끝난 이맘때쯤 시집을 갔다. 자기보다 40살이나 많은 신랑을 따라 앞산 마루를 넘어가던 그녀 뒷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쯤 벌써 하늘 사람이 되었겠지만, 그립고 또 그립다. 감자를 깎는다. 용기에 물을 담아 깎아 놓은 감자를 물속으로 던진다.

태놈이는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읽었는지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그 이야기가 그렇게 구수하고 재미있었다. 처녀귀신 이야기, 호랑이 이야기, 용 이야기, 가난한 머슴 이야기, 소박맞고 온 며느리 이야기,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감자 한말의 껍질이 다 깎아 졌다.

달 밝은 밤이면 술래잡기도 한다. 항상 술래를 도맡아한다. 달리기를 잘 못하는 탓이다. 그래도 항상 웃는다. 공기놀이를 해도 그렇다. 손이 두툼해 공기놀이를 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싱긋 웃는다. 그녀의 마음은 비단결이다. 무엇이든 부탁을 하면 거절이 없다. 어린시절 별이 쏟아지는 밤, 화장실을 홀로 갈 수가 없다. 귀신이 무서워서다.

그 땐 태놈이를 깨운다. 태놈이는 귀찮아하지 않고 같이 가준다. 하늘이 차갑도록 초승달이 뜬 밤, 그녀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린다. 무서워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끼리의 약속으로 인해 시집을 훌쩍 가버렸다.

호박 꽃 안에 꿀벌이 들어가면 호박 꽃잎을 오므려 쥐고, 나의 귀에 호박 꽃 안에서 윙윙대는 벌 소리를 들려주고, 도라지 연청색 육모꽃 따서 가만히 다가와 손바닥으로 마주쳐 놀라게 해주던 그 태놈이가 갑자기 훌쩍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 이후, 태놈이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세상에 여자가 반, 남자가 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고 싶은 얼굴은 그녀뿐이다. 왜 그럴까? 그녀는 가슴이 따듯하고, 항상 배려해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마음이든 편안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나의 이종사촌 누나다. 하지만 촌수가 가까워서는 아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천사 같았던 그 너그러움이 바로 지금까지도 태놈이가 보고 싶은 이유인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외모지상주의에 빠졌다. 특히 여성들이 더 심각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외모로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간다. 최근 인터넷 쇼셜 네트워킹 서비스(SNS)에서 팔로어를 57만명 갖고 있던 한 호주소녀가 자신이 올렸던 사진 2,000장을 스스로 삭제하고 ‘SNS는 허상이다’라고 주장했다.

12살부터 자신의 몸매 사진을 보며, ‘좋아요’로 반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았던 관심과 인정을 자신의 우월이라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꾸미며, 연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나친 욕구가 점점 강하여 지면서 자신의 자존감 보다는 타인의 인정이 자존인줄 착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SNS상에서 클릭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는 자신이 바로 허상을 쫓아 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렇게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수차례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타인들로 하여금 인정받기 위해서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의 반복은 자신의 윤리 감각도 무뎌지게 하고, 자기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는 자신의 실존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자신의 외모가 타인과 비교하여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남보다 더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면 우쭐함에 빠져 타자를 무시하는 사람이 된다.

내 스스로 나를 보는 내가 있다. 남이 나를 보는 내가 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가  바르게 자기를 보는 것일까? 내가 나를 보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이해이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은 단지 나에 대한 그의 인식이 투시된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다른 이도 나를 온전한 나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절대자 앞에 서보라. 그가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보라.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외모는 보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나는 본다’라고. 진정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다면 당신의 마음을 보는 자 앞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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