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신문이 만난 사람 >올 사회공헌대상 민맹호 시의원

[부천신문] 악재를 기회로 바꾼 택시 운전사.
67세에 검정고시 도전 2년 만에 대학교 합격, 기적을 만든 기업인.
인생 3모작에서 삶이 활짝 피고 있는 정치인.

부천시의회 민맹호(71)의원에게 여러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현재는 직업이 네 개다. 시의원이고 부일교통 CEO이고 대학생이고 현장교수다.

민의원은 지난8일 부천시 211회 임시회가 열리던 날 시정 질문을 끝내자 곧장 여의도 국회로 내달렸다. 이날 사회공헌 대상을 받기 위해서다. 그와 함께 승용차에 올라 그의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들어 봤다. 그는 파란만장한 과거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올해의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는 이유는?

 12년째 해온 장학사업 공로를 인정 받았다. 중고생에서 대학생까지 매년 20명씩 1인당 50만원씩 총 1천만원을 지원해주고 있다. 부일장학회를 2005년에 설립, 공부 잘하는 학생들보다는 불우한 학생들에게 돌보고 있다. 장학금을 받고 성장한 학생들이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오거나 그 부모들이 감사를 표할 때 보람이 크다.

-211회 임시회에서 족구장 관련 시정 질의를 한 배경은?

외곽도로 하부(해그늘 공원 66번 교각서 중동IC 77번 교각까지 300m)에 방음벽을 설치하면 족구장 옆 아파트 소음 민원 해결을 할 수 있고 족구장 면도 넓어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을 약 9억 정도 소용된다. 시청 과장이 즉시 현장 확인을 했다고 한다. 조만간 성사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년간의 의정 활동에서 나름대로 성과가 크다.
나는 자동차 전문가이다. 부천시 36개동 작업차량을 2륜차에서 4륜차로 바꿨다. 또 유효 기간이 지나 방치돼 있던 방독면을 사무 감사를 통해 새 것으로 교체했다. 어린용 차량 썬팅이 짙어 사고가 많이 났다. 옅은 썬팅으로 바꿔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됐다.

 -‘꿈을 이루는 민맹호의 인생 3모작’이란 책을 내셨는데...

 인생을 제3막으로 나눴다. 제 1막은 33세때 군 제대 할 때 전까지 생활이다.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지라산 밑자락에서 자랐다. 7살때 6.25가 발발했다. 빨치산들이 63년도까지 암약했다. 밤에 내려와 학교를 불 지르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갔다. 어릴 때부터 빨치산의 고통을 보고자라 울분이 컸다. 시골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가난한 농부가 되는 것이 싫었다. 해병대에 입대 하사로 장기 복무를 했다. 71년 계엄군의 일원으로 부천에 파견 복무를 할 때 아내를 만났다. 월남전에 청룡부대 전투병으로 참전, 부상을 입어 국가유공자가 됐다.

 제 2막은 36세때 82년부터 개인택시를 직업으로 할 때 이다. 제대후 13년간 택시를 몰다 마을버스 사업을 12년간 했다. 2005년 시내버스 사업 면허를 땄다. 운행 차량이 3대서 80대로 운수업이 커졌다.

 제3막은 66세때 2011년 시의원에 낙선하면서 시작됐다. 낙선후 인생역전이 일어난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자격증을 2년만에 취득, 2014년 3월 급기야 대학(부천 카톨릭대 경영학과)에 진학 했다. 그해 10월 시의원에 재도전 당선된다. 2015년 10월 14일 카톨릭대 현장 교수로 임명돼 대학생들에게 사회생활 기초를 가르친다.

-개인택시 운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 운수 사업자로 어떻게 성공했나.

  제대후 13년동안 개인택시를 몰며 서부권역(광명 부천 김포 강화) 지부장을 6년간 역임했다.

 당시 부천시 초대 이해선 민선시장 시절이다. 대중교통 활성화 이슈가 대두 됐다. 95년도 소사 3동에 신앙촌 기숙사가 있었다. 기숙사 분들이 역곡역까지 가는 마을 버스 운행 요구하는 집단 민원을 제기했다.

 이시장이 당선 후 공약을 지키려 사업자를 공개 모집했다. 당시 7개 곳서 응모 했다. 국가 유공자 점수에서 만점을 받아 사업자로 최종 선정 됐다.
개인 택시를 판 종자돈과 빚을 내 마을버스 3대를 구입, 소사3동에서 역곡역까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최다선 서강진 시의원이 개통식에 참석했었다.

 IMF이후  돈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버스를 많이 이용했다. 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간 급성장 했다. 이를 발판으로 2005년에 시내버스 사업권 면허를 취득했다. 지금은 8개 노선에 2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운수 사업자에서 시 의원에 도전한 동기는?

 2010년도 시내버스 사업 5년째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던 때다. 부천시의회 모의원(현재도 시의원)이 시정질의를  통해 부일교통이 급성장한 의혹을 제기 했다. 어떻게 면허를 받았느냐  특혜가 아니냐. 노선연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에서도 한달째 이를 받아 보도하자 급기야 원미서에서 수사에 들어갔다.
5년치 회사 자료를 압수수색 했다. 경찰에 이어 검찰까지 6개월 수사를 받았다. 결국 2011년 2월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참으로 억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운명을 바꿔났다. 당시 상 2동 마선거구에 현직 시의원이 선거법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 했다. 상 2동 주민 자치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다. 6개월동안 수사로 생고생을 해 오기가 생겼다. '시의원이 뭐길레, 나도 한번 해보자'  결기를 다졌다.

 당시 이사철 국회의원에 운을 띠웠더니 “66세 그만 둘 나이에 왜 나서느냐”고 나무랐다. 보름후 다시 만나 상의를 하자 “대학교는 어디 나왔냐” 물었다.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말하자 “그런 학벌, 그 나이에 턱도 없다” 고 했다.

 경선만이라도 참여 해달라고 졸랐다. 이 의원은 당시 한나라당 김모 후보를 점찍고 있었다. 김 후보는 대의원 50명의 표를 확보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진성당원 300명을 모아 대의원 60명을 확보하자 김모 후보가 돌연 탈당 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궐선거에 들어 갔지만 상대 후보가 교통사고와 폭력 전과를 들먹이며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105표차로 고배를 마셨다.


- 어떻게 낙선후  66세에 검정고시를 볼 마음먹었나

  낙선후 남들이 초등학교 졸이라고 무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대방 후보도 이를 걸림돌로 봤다. 67세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내가 '망신 당한다'고 반대 했다. 집을 나와 2년간 소사 3동 주공 아파트 즉 회사 기숙사 아파트에 기거 하며 공부했다.

 2012년 7월 처음에 검정고시 학원에 갔더니 나이가 많아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거부 했다. 학원 원장이 시험을 봐서 60점을 넘으면 수강을 시켜 준다고 했다. 도덕 과목을 시험을 보고 난후 학원에 등록이 가능했다. 8개월 만에 주경야독 끝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패스 했다.
 그해 10월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 2013년 5월에 75점을 받고 통과 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쉽지 않았다. 공부하면 쉽게 까먹었다. 오전 오후 하루 7시간씩 공부에만 몰두 했다.반복의 힘은 대단했다.

학원 원장이 점수가 좋으니 대학교 수시 모집에 응시하라 했다. 2013년 12월 카톨릭대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 했다. 국가 유공자라서 학비를 전액 면제 받았다.

 낙선하고 운명이 뒤 바뀐 것이다. 대학생이 된 이듬해 2014년 69세 최고령 시의원에 당선 됐다.

 -자신의 강점은? 정치와 CEO 어느것이 어려운가.

악재때도 억척같은 진군을 한 것이다. 오히려 도전 할 기회라 생각했다. ‘될 수 있다 할수 있다’긍정적 마인드에 답이 있다. 노력하면 기회가 온다. 시 의원이 낙선 후 4년간 시의원이 되고자 하는 계획을 한 번도 변경한 적이 없다.집념의 산물이라 본다.

 정치가 더 힘들다. 정치는 지역민들을 가족처럼 여겨야 한다. 이해 집단의 갈등을 잘 조절해야 한다. 일을 건성으로 해도 표가 안 난다. 그러나 선거로 심판 받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해도 그 대미지가 크다. 민원을 해결 못하면 핑계를 된다. 책임 정치가 필요하다.

 CEO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운수 사업  CEO로서 직접 운전도 하고 잡일을 하면서 직원들 앞에서 항상 솔선 수법 하는 자세로 일해 왔다. 사업이 더 단순하다고 본다.

앞으로 큰 정치를 펼치고 싶은 것이 꿈이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