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신문]봄이 온다. 봄이 왔다. 봄이 간다. 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버들강아지의 솜털을 흔들고 죽은 듯한 사신 같던 가지에 하아얀 함박눈을 녹이고 목련을 피워 올렸다.

온 산엔 연분홍 진달래로 지천이 되게 하고, 흙이 보이던 산과 들마다 생명 색 연초록으로 단장시켰다. 그렇게 계절은 소리 없이 자기를 들어내며 바람과 온기로 부드럽게 말없이 모든 것에 나누어주고 사라질 뿐이다. 봄이 온다고 할 때도 아직 먼 산꼭대기에 눈이 희뿌옇게 모자를 쓰고 있다.

봄이 왔다고 하지만 아직 음지보다 양지가 좋다. 그러나 봄이 간다고 할 때는 이미 지천이 초록 향연이고, 여름인 줄 착각하기도 한다. 봄을 새 아씨라 표현하는 것이 아마 이렇게 살포시 왔다가 얌전히 가는 것인가 보다.

미국의 IT산업의 주역들이 언제부턴가 바뀌고 있다. 유럽계의 백인들에서 아시아계의 다양한 민족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민족이 바로 인도(India)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인도인들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랜 역사를 토대로 변화를 추구했던 인도인의 특성상 그들은 변화를 행할 때, 과격하지 않게 차분하게 심려 있는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것을 서양인들이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부 활극을 보듯이 유럽계통의 코카시안(백인들)들의 특징은 두 사람이 총을 들고 등을 대고 서 있다가 몇 걸음 걸어가서 먼저 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식의 매몰차고, 몰인정하며, 잔인한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현대의 사회에서는 그들 역시 평화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지구가 돌고, 달도 도는, 돌고 도는 인류의 현상인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은 변화할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농경사회에서도 급격히 기계적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모든 것이 변해간다. 손자들을 등에 업고 앞마당을 거닐면서 빨랫줄에 펼쳐 걸어놓은 옷가지를 걷어 정돈하는 툇마루의 할머니다. 그 옆에서 잠자던 아기 모습을 보노라면 저기 어디에 변화가 있겠는가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얼마가 지나면 등에 업혔던 아이는 학교를 간다고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책가방을 메고 싸리문을 나선다. 할머니는 걷는 것보다, 서는 것보다, 앉는 것보다, 누워계시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리고 이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변화 없는 변화 속에서 오히려 평화를 느낀다.

산업사회는 삼대가 함께 사는 가족을 뿔뿔이 헤어지게 했다. 일 찾아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향했고, 부부중심으로 둘만 낳아 잘 키우자고 다짐하는 핵가족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도 못내 조상이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 여유만 나면 마음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대가족하에 지키던 질서를 당연히 받아드리는 시대였다. 옛것과 새것,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무리 없이 과격하지 않는 변화를 겪었다.

정보사회가 도래하자 이 마저도 쉽지 않았다. 남녀 할 것 없이 산업사회에서 기능자로 자랐다. 자기 나름의 능력이 있다. 자기 기호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개인의 의사대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들이 굳어졌다. 저마다의 생각이 있으니 자기 것을 주장하는 것에 다들 바빴다.

지금의 손자와 할아버지는 화성과 목성 사람처럼 만났으니 할 말이 없고, 대화를 하는 듯 하나 뜻은 단절되고, 귀신곡할 노릇 같은 정보기기를 보고 낄낄대는 손자, 손녀가 정신질환자인가 의심할 정도로 변화의 폭이 너무도 커서 강 저편과 이 편이 아니라 강의 원류와 바다 같은 간격에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급속한 우리 사회의 변화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변화라고 한다.

세계를 돌아보면 왕이 있는 나라가 여전히 존재한다. 많다. 대낮 같은 밝은 시대에 캄캄했던 전제주의 상투를 그대로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태국을 다녀온 일이 있다. 왕이 죽었다고 1년 동안 조기를 달고 곳곳마다 돌아가신 왕의 초상화를 세워두고,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끈질긴 향수병이라고 해야 할까?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은 신도 아닌 사람을 신으로 모신다. 바로 천황이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기꺼이 천황의 신민이라고 스스로 자처한다. 그들은 왜 사람을 신으로 모시고, 천황을 숭상할까? 비이성적이라고 해야 할까? 비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당사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그저 하던 대로, 있던 대로 유지하며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약이 오른다. 그렇게 급격한 변화를 조심스럽게 행하던 그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단칼에 왕을 평민으로 만드는 엄청난 변화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뭔가 너무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자연스럽게’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변해가면 안 되는 걸까? 받아드리고, 익숙해질 수 있는 배려의 시간을 요청하는 것이 너무 무례한 요구일까?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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