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영 한양대학교 국제교육원 한국어강사

[부천신문]1986년 3월 6일 일요일 오후, 영국 런던 일링(Ealing) 자치구 목사관. 영국국교회 목사 마이클 서워드(Michael Saward)와 21세 딸 질(Jill), 질의 남자친구 데이비드 커(David Kerr)는 함께 TV를 보며 담소 중이었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술과 마약에 취한 4인조 복면 강도의 야만적인 사건 일명 ‘일링 목사관 강간사건’으로 목사관의 한가로운 오후는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 형량을 경감(lenient course)한다”고 판결한 판사의 판결문으로 인해, 대처 총리는 물론이고 질을 포함한 피해자와 여성단체들은 허술한 법과 제도, 법원과, 검찰 그리고 언론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나태하고 안일한 성범죄 인식에 분노했다. 이후 이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영국 사회의 총체적 몰이해와 비합리적 인식성을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의회는 이듬해 법을 개정해 강간 피해자의 익명성을 보장했고, 언론도 보도지침을 마련하는 등 영국의 사회에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영국 형사재판은 검사가 판사의 무죄 판결에 대해 법률위반이나 절차적 위법성이 드러날 경우에만 항소를 진행 할 수 있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양형이 현저하게 관대하다고 판단 될 경우에도 항소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에도 질(Jill)은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법ㆍ제도 및 사법 관행 개선 캠페인을 지속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은 성범죄 관련 재판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적어도 영국에서는)되는 것들이지만, 재판 중 성범죄 피의자가 피해자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었던 규정 폐지, 피해자의 과거 이성관계가 현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한 것, 부부 간 강간죄의 인정, 구강ㆍ항문 성폭력 등의 가중처벌 등이 그것이라고 한다.

대만 헌법재판소가 지난 5월 아시아 최초로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만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동성애 권리에서 진보적인 편이다. 헌재는 "결혼 계약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현행 민법 조항이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에 위배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이 판결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어떠한 영향으로 다가올 지 귀추가 주목된다.

역시 지난 5월 일본 고베(神戶)시가 혐한(嫌韓) 시위 등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특정 민족·인종에 대한 혐오 발언·시위 등)를 억제하기 위해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조례가 제정·시행되면 고베시는 일본에서 오사카시(작년 1월 시행)에 이어 헤이트스피치 억제 조례를 시행하는 2번째 지자체가 된다. 그러나 이 조례에서는 처벌이나 사전규제 규정이 없어 실제로 실효성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제도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명을 변화시킨다. 질(Jill)의 노력으로 제도화된 인권은 영국사회를 변화시켰고, 성범죄로부터 여성의 권리를 보호했다. 대만의 용기 있는 판결은 아시아의 여러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또한 고베(神戶)시의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를 억제하기 위한 조례 제정의 시도는 일본 인권운동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충청남도의 인권조례 제정, 인권위원회 설립, 인권선언 채택, 인권센터 설치 등 인권체제와 여러 인권행정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지방정부의 최소한의 노력임과 동시에 국가의 중요한 인권의무임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1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여전히 ‘인권’은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용어였다. 언어는 사물을 규정한다. 그래서 공자는 정명(正名)이 필요하다고 했다. 언어를 통해 규정된 의미와 내용은 형식을 통해 연대를 한다. 우리사회는 인권에 대해 어떠한 언어로 규정하고 있는가. 인권을 통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가. 인권을 통한 변화의 과정에 필요한 내용과 수준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다. 그러나 국민적 체감현실은 그렇지 않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를 거쳐오면서 절대적인 국가권력의 경험은 성숙한 시민사회로의 진입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권력과 경제성장의 성과는 일부 소수에게 한정되고 ‘성장 다음에 분배’라는 논리와 ‘자유가 있고 다음에 평등’ 이라는 식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어 ‘겉과 속이 다른 민주화’를 이룬 셈이 되었다.

인권은 정치가 추구해야할 가장 높은 가치이자 지상명제다.
적어도 우리는 87년 6월 이후 표면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정치적인 공간에서 사회공동체 구성원과의 정치적 논의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권과 상식을 배반하지 않는 나라. 우리가 다음으로 꿈꿔야하는 목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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