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교수님이 이번 학기에는 특별한 레포트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주제는 '능력대로 생산하여 필요한 만큼 분배하는 이상적 사회' 였다고 한다. 생소한 주제라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도서를 모두 꺼내놓고 며칠을 밤잠까지 설쳐가면서 레포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A학점을 기대하면서 학기말 성적을 기다렸다.

그런데 C+가 나왔다고 한다.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기대치보다 너무 낮은 것 같아서 교수님에게 찾아가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도 발견할 겸 찾아갔다. 교수님은 왜 이 학생이 자기를 찾아온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한 바를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아!’하시면서 학점에 관한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이번 레포트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더구만. 잘 하셨어. 그런데 나에게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 (축구선수 누구의 이름을 대면서) 그 학생이 축구를 하느라고 레포트를 내질 못했어. 그래서 F학점을 받아야해. 그런데 생각하다가 학생의 레포트가 학생이 주장한 논지대로, 능력대로 생산한 A+였어. 그런데 필요한 축구선수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지. 그래서 둘 다 C+를 주었어. 내가 한 일이 학생의 레포트 내용과 동일한 조치가 아닌가?"

그렇다. 능력대로 생산하여 필요한 만큼 서로 균등한 분배가 이상사회라고 주장하였으니 할말도 없다. 그러나 인사를 하고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생각해보았다. 하향화하여 균등분배를 하면 모두가 하향화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학점은 그렇다치자.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실제상황이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야' 라고 자기도 모르게 자조적인 한숨이 나왔다고한다.

행복이란 주체적일까? 상대적일까? 조상들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부모님들의 행복관에는 감사와 은혜라는 중심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도 최선을 다하여 효행을 하고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정성껏 드렸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절대 빈곤이었다. 그러나 가난을 내 탓으로 돌리거나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지도 아니하고 부모님이 유산을 주시지 아니한 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부모를 원망하지도 아니하였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할 뿐 자기 자신의 삶에 자족을 하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다. 농경사회의 대부분은 그렇게 자족하면서 살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도시에 일자리가 소개되면 보수는 뒷전이고 도시의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해했다. 한마디로 누구나 행복했다. 누나가 희생하여 얻는 몫으로 동생의 학비를 충당하기로 하고 아들의 일하고 받은 수입으로 부모님의 영농자금에 보태기로 하였다. 그래도 아들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불평하지 않았다. 마치 구도자처럼 빈함을 기쁨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행복은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에 속한다. 스스로 암자에서 득도를 위해 기인처럼 고행을 하며 마음에 정욕을 이기기 위해 다섯 손가락을 다 태워가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는 구도자는 이것이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다만 그래도 정욕이 사라지지 않음이 불행이었다. 사랑하는 부부는 지하 단칸방이 그들을 불행스럽게 만들 수 없었다. 행복은 극히 주관적이고 자신의 정신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이고, 가치관에 달려있다. 청백리의 행복은 근검절약으로 긍지와 기쁨을 누렸다.

1960년대초 도시산업선교회라는 종교기관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당신은 노동을 착취당하고 산다.'라고 의식화하였다. 당신이 일한 희생으로 사장은 호의호식하고 사치하며 부하게 살고 있다. 사장의 부한 삶은 '당신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누리고 사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되자 그 때부터 작업반장의 말을 듣기 싫어졌고 고생하며 고향이나 남동생과 부모를 돕던 일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산업선교회가 말하는 노동자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후 노동자의 결속과 노동조합의 활동은 아주 정당한 것이 되어 합법화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산업교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운동은 이념투쟁으로 발전하고 드디어는 정치노동도 발전했다. 모든 것이 절묘한 진화로 보여진다.

그런데 능력껏 노력하여 생산한 다음 필요한대로 나누어주는 이상 세상이 한국에 접목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균등을 위한 하향화. 모두 평등하게 가난해져야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던 잘살아보자던 근대화의 열매는 모두 포기하고 균등분배를 통해 소유의 균등으로 오는 외적 만족과 상대적 행복감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국제사회는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이 경쟁대열에서 하차하자는 것 일까? 의문이 되어 이 학생은 번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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