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성찬식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자기 죽음을 예고하고, 그 의미를 상징한 예전이었다. 천주교회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성찬식의 나누어지는 떡은 예수의 몸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에 근거하여 소중히 다룬다. 신부만이 마시는 포도주는 한 방울도 귀히 다룬다. 예수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몸에 다 덕스럽지 못한 문양이나 피를 묻혀 태우는 것은 예수의 화형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군대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와 열성분자들이 행한 악행과 동일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을 믿는다. 그러므로 성찬식에 사용한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이해가 천주교회와는 다른 점이 있다. 천주교회는 신앙의 절대적 주님에 대한 위해 행위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한 국가의 국기를 훼손하여도 심각한 저항을 하는데 신앙은 정신적 차원을 넘어 영혼의 문제이므로 천주교회는 사활을 걸고 주님에 대한 경외로움을 지키고자 할 것이다. 왜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는가? 예수 성체 즉, '떡이다'라는 이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 문제는 우리의 분열이 문제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비인도적 갑질과 을의 희생, 보수와 진보, 유신론(有神論)과 유물론(唯物論), 남한과 북한, 친미(親美)와 반미(反美), 사용자와 노동자, 헤아릴 수 없는 양분에 의한 균열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국력을 쇠퇴하게 하고, 화합을 깨며, 각 사람의 마음에 미운 마음을 싹트게 하고, 피차 적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불행의 요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깊어지면 질수록 피차가 모두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홀로 사는 것이 보기에 고독하게 보여서 남자를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그 뼈로 하와(여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와를 아담(사람)에 데리고 가니 아담의 사랑의 고백은 진지했다. 나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다. 얼마나 전인격적 고백인가?

그래서 결혼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짝지어주신 사건으로 믿어 하나님이 짝지어 준 부부를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의 이성(異姓)이다.

그런데 어디서 바람이 불어왔는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은 누가 뿌린 가라지인가? 남성들은 여성을 사랑하고 싶어하고, 소중히 여기며,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은 결혼식에서 아들 가진 아버지나 어머니는 처갓집에 아들을 '징용 보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아버지가 며느리 집에 가서 화장실 사용도 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를 지키고, 반드시 며느리 집에 갈 때는 며느리에게 허락을 맡고 간다.

지난날 여성의 인격과 인권이 무시당했던 날의 보상이라도 하듯이 정중하고 소중히 여긴다.
특히 여성의 능력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향상되었고, 여성들의 역할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국가기관에도 남성부는 없으나 여성부는 있지 않는가?
남성과 여성은 항상 연모하는 사이이다. 물론 개인을 소중히 여겨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남성, 여성도 많다. 그러나 아직은 서로 사랑하고, 부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한 몸 같은 사이를 누가 이렇게 갈라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드리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를 폄하하거나 비하하거나 여성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악의적 비난이나 수모를 주는 것은 여성의 품위를 잃게 하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증적 논리인지는 모르지만 '여성은 어머니이다'라는 의식을 뭇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힘들고 어려우면 어머니를 부르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 부르는 이름도 어머니이다. 여성은 너그러움을 보여줄 때, 더욱 고귀함이 더해지지 않을까? 남을 낮추고, 내가 높아지려는 과격한 행위가 오히려 스스로를 낮아지게 하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충고를 하셨다. 어느 모임에 가든지 스스로 상석에 앉지 말라. 주인이 귀인을 데리고 와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때, 내려가야 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겸허와 겸손은 한없이 높임을 받는 도리가 아닐까? 스스로는 높아질 수는 없다. 더욱이 성당을 파괴하겠다는 생각은 다양한 뜻이 용인되어야 할 시대에 걸맞지 않는 자기 절대주의처럼 비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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