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H신문 일면의 톱기사로 종교의 법이 너무 허술하다고 보도한 바를 보았다. 연이어 지상파 방송에서 K앵커가 다시 이를 거론하는 것을 보았다.

석가여래께서는 왕자이시나 출가를 하였다. 이성적으로 보면 이룰 수 없다. 왕자로 태어났으면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왕자에게 주어진 책무였다. 그러나 그는 왕궁을 떠나 사바세계를 멀리하고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지를 놓고 심고하시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득도하시어 해탈하신 분이시다.

이 분은 종교를 만들어서 법을 세워 법도대로 그 종교를 운영하신 바가 없으시다.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각기 수행을 하다 보니 어울리게 되었을 것이다. 어울리고 보니 아직 해탈한 스님도 계시고, 아직 초수행중에 계신분도 있고 보니 질서를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 법이 제정되었으리라고 본다. 부처님이 법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종교가 되면서 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예수님 역시 종교를 만들지도 아니하고, 교회도 세우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성전을 세우신다고 하심은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신 뜻이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뜻을 밝히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였다. 밀양이 있다. 한 여인이 사랑하는 외동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면화하러 갔다. 창살 너머의 살인자는 웃고 있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면화하러 왔던 여인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도대체 저 사람이 짐승인가? 인간인가? 더욱 그를 난해케 했던 것은 나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하심으로 죄책감이 없다는 듯한 말과 행동에 진저리를 치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창동 감독이 이 염치없고, 양심 없는 신앙에 심취한 자를 질타하지만 성서는 실제 그러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한 여인이 귀신이 들려 점을 치고 있다. 그래서 수익이 높았다. 이 여인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는 사업주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여인의 귀신을 쫓아주므로 말미암아 점을 칠 수 없게 되었고, 그 여인을 고용한 주인이 관아에 고소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뻐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감옥에서 생활했다고 적혀 있다.

종교는 영혼의 문제를 우선시하고, 이성은 인격의 문제를 중시할 것이다. 심지어는 인도주의(휴머니즘)을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신앙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주도적 인간애이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인간은 온전한 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예수는 영(holy spirit)에 의한 사랑만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도주의에서 파생된 막시즘이 얼마나 악한 가를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칼 막스의 공산 선언문은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인간의 제도나 법으로 균등 분배와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제도와 법은 계급을 만들고, 균등분배는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한 사회를 창출하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이성적인 윤리로 볼 때, 오히려 비합리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이다. 종교의 적(敵)은 합리주의(合理主義)이다. 율법을 절대 진리로 알고 지키던 유대교 신자들은 간음이란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향하면 안 되는 규율로 생각했다.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우고, 모세가 우리에게 온 율법에는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은 땅바닥에 말없이 글씨를 썼다.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 이 말에 모두가 돌아가고 말았다. 그 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다.’

어느 J스님의 일화는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지 않는가? 어느 날 꼽추에 얼굴이 천연두로 심히 상한 50대 여인을 J스님은 업고 여인숙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를 지난 후 그 여인과 나오면서 참된 보시를 하였다고 하시면서 껄껄 웃었다고 한다. 불교에도 법이 있다. 엄격할 것이다. 스님의 생활제가의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이 J스님에게 그 법의 잣대로 평가하는 드러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다.

종교가 합리주의가 될 때, 종교는 종교의 신앙의 본질을 잃고 만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죄인을 죄를 사하려 오셨다고 했다. 법이란, 이익을 취한 자와 손해를 당한 자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중재하고, 중재가 불가능할 때는 결국 재판을 통해서 캐논(canon)으로 치리하는 것이다. 이 법은 사회형성의 기본 약속이다. 그러므로 법치는 당연히 세속사회는 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종교라는 어머니 품으로 달려와 안기면 누구든 누구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용서할 뿐이다. 예배 때마다 미사 때마다 용서의 선언을 한다. 그러므로 목사나 스님이나 신부님이 동역자의 죄를 정죄하라고 하면 앞장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법대로 재판하기를 좋아한다면 누가 그 성직자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겠는가?

경전에 반하는 것이 종교법이다. 종교는 인격을 넘어 영의 차원이다. 육의 차원과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사도 바울은 죄가 많은 것에 은혜가 많다고 하였다. 모든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분의 은혜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전제에서 고의로 살인한 살인자가 용서를 더 많이 받았는가?

부주의로 사람을 상하게 한 자가 더 용서를 더 많이 받았다. 누가 더 큰 은혜를 입었는가? 종교에는 내세가 있다. 다음의 세계가 본질의 세계이다.
현재는 억울함 같지만 내일에는 그 보상이 있음을 믿는 세계이다. 이성의 영역과 영적 영역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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