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순 부천 웰다잉문화연구원장

송계순 부천 웰다잉문화연구원장
송계순 부천 웰다잉문화연구원장

[부천신문] 한 젊은이의 미국 유학 시절이다. 교양과목 중 하나인 심리학을 들을 때였다.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전공과목만 듣기에도 벅찼지만, 금발의 아름다운 교수에게 반해 머리를 쥐어짜며 공부를 했다. 

여름방학을 앞둔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교수는 칠판에 강의 내용을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3일 후에 죽는다면’이다. 자! 우리가 만일 사흘 후 죽게 된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만 순서대로 말해보자. 라고 하면서 누가 먼저?”해 볼까 했다.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평소 말 많은 친구 입을 열었다. 

“음~ 일단 부모님께 전화를 걸고, 애인이랑 여행을 가고, 아! 작년에 싸워서 연락이 끊어진 친구한테 편지를 쓰고·· 그럼 사흘이 다 가겠죠?” 했다. 학생들은 웅성거리면서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떠들어댔다. 그리고 자신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쎄! 나라면 음~~!···우선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간다. 그 다음엔···꼭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고급 식당에 가서 비싼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쓴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덧 20여 분이 지난 뒤이다. 지도 교수는 몇몇 학생들의 대답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려는 학생들의 세 가지 소망은 뜻밖에도 특이한 것이 없었다. 다들 그저 평범했다. 여행을 가겠다. 기막히게 맛있는 걸 먹겠다. 싸우고 토라진 친구와 화해를 하겠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걸겠다는 등..... 

바로 그때다. 교수는 칠판으로 다가가 이렇게 단 한마디를 썼다. “DO IT NOW! 바로 지금 하라!” 들뜨고 어수선했던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죽음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일을 실천하라는 이야기다. 이 한마디야말로 우리가 평생을 배우고 익힌 그 어떤 학문이나 지식보다 값진 가르침이 아닐까? 
미국 시애틀에서 의사로 일하다 2006년 은퇴한 리처드 웨슬리(67) 박사는 운동 세포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이 힘을 잃고 온몸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오지만 적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질 것인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고 했다.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 따라 의사로부터 치사량의 진정제를 처방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자연스러운 최후를 맞게 되길 희망하지만 죽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죽음이 지연 될 경우 약을 복용 해 몇 분 안에 숨을 거두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존엄사 허용이 될 경우 의료비 부담을 겪는 저소득층 환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존엄사법에 따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웨슬리 박사처럼 백인에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1997년과 2009년 각각 존엄사법이 통과된 오리건주와 워싱턴주에서 지금까지 집계된 통계를 바탕으로 이같이 설명했다. 존엄사법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의사가 생명을 단축하는 약물을 제공하는 형태의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을 허용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미 오리건주에서 존엄사법에 따라 약물 처방을 받은 환자는 1997년 사망자 1,000명당 1명이던 것이 최근에는 500명당 1명꼴로 늘었다. 오리건주에서는 지금까지 596명, 워싱턴주에서는 157명이 약물 처방을 받았다.존엄사를 선택한 환자의 남녀 성비는 거의 1대 1이었으며, 환자 나이의 중간값은 71세라고 했다. 암 환자(81%)와 루게릭병 환자(7%)가 대부분이었고, 그 외엔 폐와 심장 관련 질환 환자 등이 다양하게 포함됐다.환자들이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도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9년 오리건주에서 56명의 안락사 처방 환자를 연구한 결과는 "56명의 환자 가운데 조력자살 선택의 주된 동기로 '고통'을 지목한 경우는 한 명도 없었다."며 “대부분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다는 열망' 또는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약을 처방 받았다"고 한다. 약물 처방을 받은 환자 가운데 3분의 1은 실제로 약물을 사용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둔 것으로 집계됐다. 처방전의 존재가 주는 '마음의 위안'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의미다.이렇게 미국의 존엄사법은 극약 처방을 받는 절차를 복잡하게 규정하고 있다. 의사 2명 이상으로부터 남은 수명이 6개월 이하라는 진단을 받아야 하고, 처방전 요청도 최소 15일 간격을 두고 두 번 해야 한다.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선택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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