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순 부천 웰-다잉문화연구원장
송계순 부천 웰-다잉문화연구원장

[부천신문] 과연 인간의 삶에 기간은...? 어떠한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의 세세한 질문과 관심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너무 상세하게 하다 보면 자칫 무시하거나 본의 아니게 핀잔을 주는 듯, 하게도 된다. 흔히 사별(死別)을 겪고 있는 이에게 위로를 할 때도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가 있겠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저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해 주고, 사실만을 이야기해 주며,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죽음에 대해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비유하는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하겠다. 만일 그 어떤 병을 걱정하는 이에게라면 분노(忿怒)나 죄책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러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적절한 방식으로 돌보는 데 유의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조그만 사진이나 그림을 가져갈 수도 있겠다.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만물에게는 모두가 시작과 끝이 있다. 그래서 그 시작과 끝의 사이가 곧 삶의 기간이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이러한 삶을 사이에 두고 시작과 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것은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그래서 이 삶의 길이만은, 그것이 무엇이며,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은 때로 병이 나거나 혹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상처가 너무 심하거나 혹은 병이 너무 깊어서 더 이상 살아 있을 수 없어 그만 죽고 만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죽음도 유아기, 성장기, 노년기,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매우 슬프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곧 삶인 것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는 예외(例外)가 없다. 생물이 사는 세계에는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다 제각기 다른 삶의 기간을 갖는다. 식물들은 키가 크고 튼튼하게 햇빛과 우로(雨露)를 받아 천천히 자란다. 어떤 나무들은 보니 아주 오래 몇 백 년도 살아 있다. 이것이  삶의 기간이다. 토끼나 쥐와 같은 동물은 단 몇 주간에 다 성장한다. 당근을 씹어 먹고 치즈를 핥으면서 일 년 혹은 이년을 살고는 그만 죽는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기간이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고 이것이 삶의 기간이다. 살아있는 화초(花草)나 야채(野菜)들은 봄에 땅이 따뜻해질 때 씨를 뿌려 싹을 틔우기 시작 한 여름 동안 산다. 그래서 가을이 되어 날이 서늘해지면 화초와 야채들은 쇠어지고 드디어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죽는다. 이것이 화초나 야채의 삶에 방식이며 이것이 그들의 사는 기간이다. 나비는 나비로서 벌들은 벌들로서 수 주간 동안 살 뿐이다. 그들의 날개가 날 수 있게 되면 꽃에서 꽃으로 펄럭이며 날아다니며 산다. 그러다 때가 지나면 더 이상 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나비와 벌의 사는 방식이며 이것이 그들의 삶의 기간이다.

공중의 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알에서 기간이 되어 깨고 나와서 혼자서 날아서 먹이를 구하게 될 때까지는 몇 달밖에는 안 걸린다. 그 후 얼마나 사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달린 것이다. 대체로 몸이 클수록 새는 더 오래 산다. 이것이 새들이 사는 방식이다. 어떤 새는 2, 3년을 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새가 얼마나 짧든, 얼마나 길든 이것이 그 새들의 삶의 기간이다. 각종 물고기는 종류에 따라 호수에서, 강물에서, 혹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산다. 어떤 물고기는 집채만큼 크기고 하다. 아는 바로는 물고기도 작은 것일수록 짧게 살고 큰 것일수록 오래 산다고 한다. 이것이 물고기들의 삶이다. 하루 밖에 못사는 물고기나 80년 혹은 90년을 사는 물고기나 이것이 그들의 사는 방식이며 이것이 그들의 삶의 기간이다. 우리 사람! 사람은 어떠한가? 마찬가지란 말이다. 어찌 보면 대의(大義)에 명분에서 만물(萬物)과 마찬가지의 삶의 방식으로 산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한 존재를 잃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는 이에게 기운 내라는 훈계(訓戒)를 하거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되겠다. 사별(死別)을 겪으며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심으려한다. 그러한 것이 물론 믿음을 통해 안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혹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의 경험에 관해서 질문을 하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를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위기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안도감(安堵感)이다. 나는 지난 4월1일 한 생애를 같이 했던 이종 4촌의 호스피스 입원 문병의 실제를 통해서 또 한 생을 사는 아우의 삶과 기간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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