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아침 일찍 빠른 템포의 트로트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원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온갖 몸짓과 인사를 거듭한다. ‘지자체장 선거가 시작되었구나’를 금방 알 수 있다. 지자체는 국가 영토의 일부를 그 구역으로 하고, 그 구역의 모든 주민을 구성원으로 하여 그 구역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법으로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배권(자치권)을 지키는 단체를 말한다. 지자체의 정의에서 ‘그 구역 안에 모든 사람’이란 문장이 있다. 그 문구에 의해서 성남시 시장을 지내다가 경기도지사를 거쳐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가 낙선하여 인천시 계양구 국회의원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이 있다. 나비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펼치는 인격이다. 합법적인 입후보이다. 누구도 시시비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자체라고 하면 우선 ‘마을’이란 개념이 앞선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마을의 자연과 문화와 전통, 그리고 삶의 자리를 가꾼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마을이 좋아서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상업적 이유나 생계로 인한 이주민들도 있다. 모두가 그 마을의 자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지만 누가 마을을 위해 헌신했으며, 봉사를 했는가?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잘 채득하고 있는가? 마을의 전체를 보살펴 왔느냐를 보아 그런 공로자를 마을의 리더로 존경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보통이다. 덴마크를 방문한 일이 있다. 국회의사당은 자그마한 마을회관 같았다. 국회의원들이 저마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온다. 물론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긴 하다. 마치 마을회관에 마을 어른들이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한국의 국회의원과는 외모가 전혀 다른 점에도 놀랐지만, 국회의원은 정치인이 아니라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농사의 작황과 추수의 추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 모두를 꿰뚫어 보고 아는 실제 리더들이 그 마을의 현안을 가지고 나와서 생활 이야기를 하듯 이야기하는 곳이 국회이다. 정치 없는 정치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의회에 모인 사람들은 실제 마을 사람들의 현안을 손바닥 보듯 하며, 의제로 다루는 것이 일상이라고 한다. 한국 국회를 보자. 날아온 나비 한 마리처럼 전국을 무대를 하여 정치하던 사람, 경기도의 전 도민을 섬기던 사람이 아무런 연고 없이 이젠 계양구에 출마를 했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도 어느 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 마을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다. 당에서 내려보낸 입후보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마을의 시민대표가 국회의원이고, 시의원이고, 도의원이어야 하는데 왜 중앙당이 사람을 선택하여 내려보내면서 주민등록만 옮겨놓고 전세나 월세집만 얻고 나도 이 마을 사람이라고 부르짖고 다니는 사람을 왜 선출해야 하나? 갑갑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중앙당이 내려꽂은 사람은 당의 사람이다. 특히 지자체의 핵심은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마을의 뜻에 결의가 되어 행정이 운영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뿌리가 지자체이다. 지역자치단체란 이름 자체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왜 이데올로기로 뭉쳐진 이념 단체의 사람이 마을에 와서 ‘내가 너희들의 대표가 되어줄게 하며 내려와 앉는가?’ 이것은 지자체의 근본정신인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처사인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치공동체라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으면 지자체법의 법(法)정신이 우선되어야 한다. 소위 하향식(下向式) 의사결정이 아닌 상향식(上向式) 의사결정을 원칙으로 삼고 주민 스스로 삶의 문제를 실제 바탕으로 그 마을에 적합하게 결정하여 시행할 수 있도록 한 마을 중심이 법 취지인데 어찌하여 당이 내려보낸 사람을 마을 대표로 뽑으란 말인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그 꽃밭에 나비, 벌들이 날아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밭이 나비 밭이 될 수 없고, 벌 밭이 될 수 없다.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적어도 10년 이상을 하든지, 얼마 이상 거주하는 사람을 대표로 세울 수 있는 법 개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살아보지도 않고 무엇을 안다고, 또한 무슨 애향심이나 애촌심이 있겠는가? 자신의 명예와 권력욕, 혹시 범법한 사람이라면 구속당하지 않기 위한 방탄을 위한 마을 지역 대표권을 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염치도, 체면도 없는 비인격적 사람이 국회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가? 온 밭에 날아다니는 벌은 비록 자기만의 이익을 얻지 않는다. 자기할 몫은 다한다. 암수와 수술을 만나게 하는 자신들이 얻어가는 꿀, 그 가치 이상의 것을 주고 간다. 벌이 없으면 농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채밭을 벌 밭이라 부르지 아니한다. 유채밭이다. 유채가 다 베어지고, 빈 밭이라도 유채밭이다.
그가 출마지의 현황을 얼마나 아는가? 그 지역 산의 높이는 아는가? 그 산에 올라가 봤는가? 그 마을에 얼마나 살아봤는가? 주민센터에 주민등록만 한다고 해서 그 마을 사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당이 내려보낸 사람을 자신들의 대표로 찍어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다. 자치권을 무시하고, 내가 당의 대표라고 얼굴과 이름을 현수막이나 벽보에 내미는 모습은 마을 주민의 권리를 내놓으라는 것은 한일합병 당시의 경술국치와 같은 것이다. 남의 권리를 쟁취하려고 온 그 얼굴이다. 만약 어느 마을에 범인이 숨어들어왔다면 숨겨주는 것이 미덕인가? 아니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쫓는 것이 미덕인가? 이 문제도 고민거리가 된다. 결코 꽃밭에 나는 나비가 꽃밭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