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완전 파괴하고, 유대인을 전멸시키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유대인들 중에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을 살릴까? 이 위기를 넘길까? 생각하다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강경파 때문에 성을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자 온 성안에 자신이 중병이 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얼마를 지난 후 죽었다고 다시 소문을 낸 다음 관에 누어 성곽을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군의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만나러 간 것이다. 사령관의 얼굴을 보자 ‘장군, 당신은 곧 황제가 곧 될 것입니다.’ 사령관은 황제를 욕되게 한다고 호통을 쳤다. ‘내 말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장래 일은 그만두고 나를 찾아온 용건만 말하시오.’ ‘제가 부탁하는 것은 조그마한 방이라도 좋습니다. 학교 하나만 남겨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만은 절대 부수지 말아 주십시오.’ 이때, 로마에서 사령관이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사령관은 놀라웠다. ‘꼭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는 ‘작은 학교 하나는 꼭 남겨 두어라.’ 온 로마군에게 지시했다. 그 이후 베스파시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이스라엘을 철저히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가 지도하는 소수의 바리사이파인들이 세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야브네(Yavneh)에 유대학교 예시바는 그대로 두었다. 여기서 신앙의 지도자를 길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의 신앙 정신을 바로 세워 오늘의 이스라엘이 있게 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가 망해도, 성벽이 무너져도, 국민의 다수가 죽어도 신앙과 교육만 살면 다시 나라가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브루타 교육을 처음 실시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꿈꾸는 것 같다. 세계 7위를 자랑하는 경제 및 첨단 기술의 보유 나라이다. 국민 소득 3만 8천불의 고소득의 나라이다. 세계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다. 10대 교역국이다. 세계 국방력이 6위를 마크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교육이 시들고 있다. 교실의 교육이다. 그리고 학교다. 이회찬이란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 학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교사는 노동자다. 정보를 공급하는 공급자이다. 학생은 정보를 소비하는 소비자이다라는 개념을 심은 장본인이다. 현행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자유와 권리 보장을 위한 대한민국 교육청의 조례이다. 2009년 경기도 교육감에 종사한 김상곤은 학생인권조례를 제시했고, 당선되어 교육감이 되자 학생인권조례 제정위원회(위원장은 나중에 서울특별시 교육감이 되는 곽노현)를 구성하여 조례안을 만들고 학생 참여기획단의 의견을 검토한 후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되었다. 2010년 9월 16일 경기도의회를 통과했다. 학생인권조례는 경기도 의회에 민주당이 다수 차지하고 있어 결의되었고, 서울은 주민발의가 성공하여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교육을 잠재우는 수면제가 되었고, 교권을 짓밟는 광기가 되었다. 실제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례를 보면 공교육 학교에서 학생의 40% 이상이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선생님이든 깨울 수 없다. 학생 인권의 침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설 학원에서 선행교육을 받고, 학교에 오면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없어서 잠들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대다수는 수업에 관심이 없다. 이를테면 학업 포기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학생 인권조례로 인한 교실의 인격 교육이 폐기 되었다는 것이다. 학교가 망하고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은 다반사다. 교육(education)이란,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시작되고, 피차 존중하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는 대화로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교육의 뿌리는 BC 100년에서 AD 100년에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공자와 노자, 맹자 같은 분들이 인격 교육에 이바지했고,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의 랍비중심의 인격 교육, 그리고 기독교의 예수를 통한 인격 교육, 중동에 마호메트와 인도의 불교를 시작한 석가모니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헬라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교육 방법론은 제자와 선생의 인격적 만남과 대화로 교육하였다. 그 당시 교육은 창의적인데 방점을 두고 묻고, 답하고 그리고 함께 생활을 나누며 인격 도야를 했다. 교육은 피교육자의 내면에 있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이다. 결국 대화와 명상, 그리고 삶의 나눔을 통해 서로 내면의 세계를 나누고 보다 나은 깨달음과 진리와 논리의 탑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쩜 요하난 벤자카이의 하브루타 교육이 전 세계 유명대학의 교육이 되었다.
학교 교실에서 우리의 희망들이 잠들고 있다. 교육부 장관이 경질되든지 대통령이 수십번 바뀌든지 정당이 엎치락뒤치락하든지 이런 유는 정치 세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육은 정치적이어도 안되고, 대중적이어도 안된다. 교육을 살리는 길은 교사 권의 확보이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는 폐기하고, 학생 품위 양성을 조례가 필요하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폭력, 언어폭력, 따돌림당하고, 무시당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나라는 언젠가 그 국민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시급하다. 국가 비상사태다. 교실을 살리고 교실을 깨우자. 이것이 급선무다. 국민도 낳지 않으려 하고, 국민도 바르게 키우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어느 날 이 지구촌에서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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