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윤 대통령께서 미국의 하원의장 펠로시가 회담을 요청해 왔으나 휴가를 핑계 삼아 직접 만나지는 않고 전화로 대화를 했다. 펠로시의 저돌적 대만 방문은 자신의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자신의 선거구인데 샌프란시스코에는 23%의 중국인 유권자가 있다. 그들의 염원을 알고 있기에 대만을 방문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에서는 기시다 총리와 회담을 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과 중국의 무역의 파트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기업을 위해서 혈맹인 미국의 하원의장을 만나는 것을 기피했다고 보아진다. 잘했는가 잘못했는가를 논하기 전 분명히 한 국가의 지도자는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벗이 있으면 적도 있기 마련이다. 사실이다. 전 문 정부 시절 중국의 입맛 맞추기에 온갖 정성을 다 드렸다. 외무부 장관이 중국에 가서 삼불일한(三不一限)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정부 인수위는 당시 이러한 내용을 관여한 당사자들이 실제적 진실을 국민께 밝히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전 문대통령이 중국 방문시 혼밥 문제가 심심찮게 거론되기도 했다. 국제 문제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동네 마을 아이들의 놀이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자녀가 외동인 경우가 많아졌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자녀가 10명이 넘는 가정이 있었다. 이런 가정은 대가족이다.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킨다. 학교에서 10자녀가 동시에 다니지는 않지만, 3명에서 4명 정도는 한 학교에 다니기 일수이다. 이런 형제가 많은 아이들은 다른 친구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놀림을 당하지 않는다. 형제가 함께 방어나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왜 조선은 망했는가?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논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자진 쇄국정책과 타의에 의한 고립이 있다. 1543년 시암(태국)을 떠나 명나라로 향하던 중국선 한 척이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텟포(鉄炮) 건네주었다. 화승총의 일종인 조총(鳥銃)이다. 1543년 8월 25일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섬 서남단 가도쿠라 곳에 도착했다. 이 선박에 포르투갈인 2명이 타고 있었다. 폭풍으로 좌초한 것이다. 다네가섬의 영주인 다네가시마 도키다카(種子島 時尭) 부자는 총의 위력에 감탄하여 비싼 돈으로 사고 당대의 장인 야이타 기요사다에게 똑같이 만들라고 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에 오자 기요사다는 그들에게 다시 제조법을 배워 첫 화승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2년전 1590년 3월 쓰시마 국주 소요시토시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칼 등을 선조에게 진상했다. 그때 정황을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임금께서는 공작은 날려 보내라고 했고, 조총은 군기시(병창고)에 보관토록 하였다. 조총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 때, 조선의 참변은 필설로 적기가 두렵다. 왜 외부의 문들을 외면하고, 자기들 것만 지키려 했을까? 그것은 내치(內治)에 급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눈을 의식해서 미국 하원의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는 내치(內治)를 외교보다 앞세우는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이 어찌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는가? 그 당시 국력으로는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 영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같이 했다. 일본이 왜 청나라를 이길 수 있었는가? 미국과 불가침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은 조선을 일본에게 양위한 상태이다. 문안정치가 외교정책보다 우선인 것은 사실이나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면 나라가 멸망한다. 세계의 흐름은 어느 나라이건 영원한 중립국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동일한 이념이냐 이익공동체를 결성하고 서로 피차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세계 정치이다. 조선의 멸망 원인의 하나는 고종의 자기정체감이다. 자신이 국가이다. 국민도 자기 것이고, 주권도 자기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완용을 시켜 일본에 보내서 신안 앞바다 섬을 담보로 돈을 빌려 공주의 결혼을 시키고, 외교가 단절된 상황에서 오죽 외로웠으면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기대어 있었든지 사인검(四寅劍)을 하사했을까? 사인검은 충신 중에 충신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왕이 황제가 되었지만, 일본이 두려워 아관파천(러시아 공사에 한동안 고종이 지냈음) 하였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지 않았는가? 동학난 역시 마찬가지이다. 1894년 1월 10일에서 1895년 3월 29일에 있었던 농민운동이었다. 고종은 대화 한번 없이 일본군을 불러 자기 국민을 일본군의 조총에 제물 되게 했다. 물론 고종 청병은 아니다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왕이 백성의 원성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왕이 아니며, 백성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윤 정부는 이미 전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맺은 한미군사동맹을 공고히 하고,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념의 세계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두려워할 것 없다. 자유와 민주는 국민이 스스로 생명과 바꿀만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윤 정부가 민주와 자유만 지켜 준다면 모든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어떤 어려움도 국민들은 참고 견딜 수 있다.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비인간적 유물론 이념의 적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형제가 한 학교에 다니면 누구도 무시하거나 폭력을 가할 수 없듯 튼튼한 자유민주 동맹을 공고히 하여 무신론자들이 위협을 가하더라도 오직 한 길로 갈 때, 안보와 국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벗이 있으면 적도 있다. 당연한 이치임을 알라. 77년전 대한민국의 광복과 건국 정신은 자유와 민주주의이다. 이를 국가 경영에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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