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불교의 전래는 삼국시대 때 이루어졌다.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 전래에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불교는 신라의 국교가 되었다. 기독교 역시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서 숱한 순교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다종교 국가이다. 신자(信者) 수도 엇비슷하다. 그러나 종교와 종교 간에 갈등이 없다. 아마 세계에서 유일한 종교갈등 없는 나라일 것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헌법상의 원칙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국가가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해석을 한다.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가히 주자학이 조선 정신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파죽지세로 나라가 허물어질 때, 호국 승려들이 뛰어들어 승군 내지는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를 두고 불교의 정치참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취임할 때 특정 종교인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그러면서도 헌법상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미국 역시 대면을 비대면으로 정부가 강요할 때, 미국의 교회들은 대면예배를 고집했던 교회가 결국 정부와 교회가 법적 다툼을 하였다. 미국의 대법원은 국민의 신앙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었다. 국민의 자유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법보다 우위라고 보았다. 물론 개천절을 기해서 광화문에 모여든 헤일 수 없이 많이 모인 국민들을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딱히 분류하면 역사선험(歷史先驗)의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 가을비가 내리는 광화문 거리에 국민들이 모여 집회를 하는 것일까? 임금을 올려달라는 임투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지금의 세계는 신(新)냉전주의로 흐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1950년 소련의 남침 사건과 동일하다. 공산주의 세력 확창이다. 중국의 시진핑의 장기 집권은 불보듯하다. 시진핑의 투쟁이란 말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혁명이다. 시진핑의 혁명은 중국몽을 이루기 위한 혁명이다. 중국몽은 중국 국내의 꿈이 아니다.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욕이다. 중국은 사회주의라고 하나 전체주의이다. 중국은 시진핑의 독재제국이 되어간다. 옛 소련의 영광을 다시 찾겠다고 나선 러시아의 푸틴 역시 전체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험천만의 협박을 하고 있다. 유럽에겐 에너지를 차단하면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지지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주역 고(故) 고르바초프의 장례식도 참여하지 않고 그의 치적을 폄하하였다. 장기집권은 결국 권력의 사유화(私有化)를 가져오고, 권력의 사유화는 국가의 힘을 집권자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북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뜨겁게 끓는 가마솥이 남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은 전체주의의 절대권력과 폭력 앞에서 타협하고 잠시의 유예를 평화라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폭력집단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냐? 아니면 인류 다수가 지지하는 보편적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현실 앞에 서 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에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국치를 경험한 세대와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Marxism)의 일방적 침략으로 나라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던 경험 세대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다시 지난날의 비극이 재현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학교 교실에서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인식되어온 소위 다원화된 사상과 다면화된 인격을 정당한 이치로 인식된 세대에게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와 상대화하고 선택은 자유라는 매우 합리적으로 설득한 후 역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편집으로 오히려 인민민주주의가 인도적이라 고취 시킨 전교조의 교실 장악 이후의 세대들은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만들어내는 예술과 문화에 젖어 마치 동물원의 사자나 애완동물 사자가 같은 것처럼 착시하게 하고 사자 우리에 뛰어들고 있는 세대가 되게 한 것이다.

가을비 맞으며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분들의 집합을 두고 세대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미 반공사상에 화석화된 단세포적 의식의 소유자들의 모임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 증거로 공중파 방송 중에 한 방송사도 광화문 개천절 모임을 보도하지 않았다. 전국 지방에서 천 대가 넘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모여 외쳐도 이웃집 개 짖는 소리로 여기고 언론들은 무시하고 있다. 특정 종교인의 집회로 보는 것인가? 세대 갈등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기우에 찬 노년들의 망령으로 보는지 알 수가 없다. 국민이 내는 수신료를 운영하는 KBS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험 세대는 역사를 몸으로 전한다. 이 세대가 모두 떠나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구전과 문자로 전달될 것이다. 살아있는 역사는 경험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일본 강점기에 살아온 비극을, 한국전쟁에서 피 흘린 세대는 결코 침묵할 수가 없다. 자신이 경험한 멸망과 비극을 후손에 다시 물려줄 수는 없다는 단호한 결의이다. 이론과 실재는 같지 않다. 막시즘(Marxism)의 선전과 선동은 거짓이다. 거짓으로 학습시켜 마치 AI 로봇처럼 만들어 악한 권력에 복종케 하는 악령의 사생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온몸으로 울리는 사이렌이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