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한국인들은 다양한 계층이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금 70세를 넘은 분들은 농경사회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지금의 50대에서 60대 되신 분들은 산업사회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하는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경험을 겸하여 있다. 농경사회 경험의 특징 하나가 있다. 이 경험을 마음살이의 경험이라고 해두자. 생경스러운 말인지 모르지만, 마음살이는 환경과 여건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절대빈곤인 상황에서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상한 것은 가난하면 할수록 농경사회에서는 마음이 더욱 갸륵해졌다. 경주 최씨의 마음살이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사는 백리 안에는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자였다. 하루 아침 한 끼니 먹는 도중에 울타리, 담도 없는 농경사회 가택 구조상 누구든지 출입이 자유로웠다. 아침 조반을 먹는 동안 거지가 서너 사람은 족히 찾아온다. 밥그릇도, 수저도 없이 찾아와서 우두커니 마당 중앙에 서 있다. 어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랴? 식구들의 각각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퍼서 모아 거지에게 준다. 서너 사람이 동냥해가면 자기 끼니의 삼분의 일은 나누어주고, 나머지를 먹는다. 혼자 주어진 밥을 다 먹어도 배부를지 말지인데 그래도 어느 식구 하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5일장에 나아가 어머니가 시장하여 국밥 한 그릇 사드시고 싶어도 내 배를 채우고, 내 입맛 따라 사서 사드시지 않는다. 이 돈으로 채소를 사고 쌀을 사면 온 식구가 한 끼니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시장 저자거리에서 식사를 사 먹는 것은 금기로 여기며 살았다. 두레란 말이 있었다. 서로 서로의 노동력을 나누며 도와주므로 공동 농경이 이루어졌다. 모두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 조금 부하다고 해서 부한 티를 내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좀처럼 가난한 것을 보이지 않는 체면을 알고 염치를 아는 삶을 살았다. 이런 농경사회의 삶을 마음살이라고 해본 것이다. 한낮 최고급 호텔 뷔페에서 20대 중반 되는 어머니와 서너살 되어 보이는 어린 딸이 한 상에 10만원이 넘는 밥을 둘이서 오붓하게 먹는 모습을 보며 곱지 않게 보였다. 농경사회 눈으로 보면 그 돈으로 온 식구가 정답게 같이 나누어 먹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마음살이에 익숙한 농경사회 경험 때문이리라.

산업사회 경험은 대가족 농경사회를 떠나 도시로 와서 핵가족을 이루고 핵가족에서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살림하는 세대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남편을 가장이라고 생각하고, 가족 구성원이 이를 긍정했다. 생계비를 조달하는 아버지의 수고에 대해서 온 식구가 경의를 표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정 대소사의 결정권을 양보하고 있었다. 산업사회의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교육이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을 책임진다. 딸이 있다. 딸에게 부엌일을 시키지 않는다. 오로지 공부만 하라고 했다. 공부 잘하면 좋은 신랑 만나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사랑받는 사람이 큰 가치였다. 그래서 자신의 단정함과 상냥한 태도, 그리고 보수가 아니더라도 보수스러운 형식 예의가 보편화했던 시대였다. 즉, 양보와 겸양을 미덕으로 알고 말씨 역시 직설보다 애둘러 하며 상대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노력을 했다. 이때, 어머니들의 자녀를 위해 헌신적 양육의 덕분으로 한국은 고학력시대를 열었고, 다수가 유학의 꿈을 꾸기 시작하여 세계인으로서 기초를 세운 것은 산업사회의 어머니들이 이룬 업적이다. 물론 그 당시 아버지들은 한국을 산업사회로 만들었고, 한 마디로 한국 경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파견되고, 적도 가까운 곳에는 원양어선 어부들로 진출하고, 중동 산업현장에 노동자들로, 심지어는 수출 주도 경제의 국가적 시책에 힘입어 세계를 누비는 세일즈맨들이 이때 모두 탄생하고, 활약했다.

지금은 정보시대, 글로벌시대이다. 결국은 개인주의의 시장과 개개인 개성과 취향이 존경받는 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정도로 정보 바다에서 헤엄치며 사는 사회이다. 한 마디하면 스마트폰을 열고 저 말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검색하고, 면전에서 틀렸다. 이것이 맞다고 판단 시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권위도 없어졌다. 스승과 지도자의 권위도 없다. 다만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결혼마저 미루고 홀로 사는 40대가 보통이다. 굳이 결혼하여 가정이라고 하는 틀에 메어 살아야 하느냐란 개인 중심사회이다. 결국 점이 선을 이루고, 선이 공간을 이루는 삼차원적 원리는 깨어지고, 점이 모이면 점들이 되고, 점들이 정하면 윤리가 되고, 문화가 되고, 법이 된다. 이를 “몸살이”라고 해보자. 이익이면 선택하고, 손해면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자기 것을 얻으려고만 한다. 염치나 겸양보다는 공정, 공유나 나눔을 좋아한다. 굳이 대면하여 인간관계를 하기 보다는 마니아끼리 가상의 세계에서 즐길 것을 즐기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으는 것이다. 누구나 네티즌들이 되어 자기는 드러나지 않고, 자기 뜻이나 이익을 만든다. 지나칠 정도의 개인 이기주의거나 집단 이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살이를 몸살이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정(情)이나 정신(情神)이 추방당한 현대사회는 가면 갈수록 사회의 체온이 내려가고 있다. 집값, 주식값, 코인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자 30대의 청년 5,000명 이상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정어리 떼가 몰살을 하여 바닷가에 떼죽음한 것은 산소 부족이라고 한다. 몸살이 사회는 차디찬 이성과 본능만 있다. 서로 손을 맞잡지 않고 혼자 살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이 우상이다. 그래서 자기만을 믿고, 자기만을 위한 살이를 하기에 몸살이가 된다. 사람에게 노동자로 그리고 동물과 그것(물건)과 혼합된 인간들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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