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후손과 조선관군의 후손들, 반목하며 같은 날 조상의 제사 준비
나라의 잘못으로 민족대립의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 이제 용서와 화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이판식 작가 "모든 백성이 똑같이 ‘존중’받고 신분이 ‘평등’한 세상 돌이켜보기 위해 집필할 용기를 냈다"

[부천신문_특별인터뷰] 2022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제113주년을 기리며 독립운동의 초석이 된 동학농민항쟁에 관한 역사다큐소설 '탐지강' 저자 이판식 작가를 찾았다. 이판식 작가는 장흥 태생으로 광주지방국세청장으로 역임할 시 고향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동학농민항쟁의 역사를 되새기며 본 저서를 집필하게 됐다.

동학군 후손과 조선관군의 후손들은 반목하며 같은 날 조상의 제사를 준비했다. 나라의 잘못으로 민족대립의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은 이제 용서와 화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며 전라북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중추원 부의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 등을 지내며 우리민족에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 

이판식 작가는 "동학농민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민족의 비극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라의 잘못으로 민족대립의 고통을 받았던 긴 세월, 이제 용서와 화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글을 쓰게된 취지를 밝혔다.

 

‘탐진강’ 저자 이판식 작가
‘탐진강’ 저자 이판식 작가

 

 

1.동학농민군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의의에 대해 궁금합니다.

지금부터 약 135년 전 조선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구며 동학을 일으켰다. 외세로부터 제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나선 백성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민 씨 척족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고, 15년 뒤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우리는 아직도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의 물결에 눈과 귀를 막고 있지 않은지 130여년이 지난 지금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라 생각한다.

19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대륙의 수많은 이름 없는 국가들도 군대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와 싸웠으나 힘에 부쳐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도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과 싸우기는커녕 외세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난 제 나라 백성을 학살했다. 3만여 동학농민군들은 외세로부터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고자 여기 남도 끝자락 탐진강 석대들에서 최후의 일전인 ‘석대들 전투’를 치르고 장렬히 산화했다.

장흥부 대접주 이방언 장군 후손들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동학농민군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있으나 아직도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주기엔 미흡할 뿐이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 되새기는 것은 후세를 사는 우리들의 책무이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반복하고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끝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의 거창한 문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어떻게 죽었고 나라가 어떻게 쓰러졌는가를 파헤쳐보는 것은 우리가 오늘을 지혜롭게 사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이방언 장군 초상화
이방언 장군 초상화                                                                                               사진 제공:호밀밭

 

2.지금까지 반복되는 역사, 모든 백성이 똑같이 ‘존중’받고 신분이 ‘평등’한 세상 돌이켜보기 위해 집필할 용기를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조선, 아니 민 씨 정권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오백여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명나라와 청나라만 철석같이 믿다 청나라가 무너지자 청나라와 함께 망해버린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것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던 위정척사 선비들은 서양과 일본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몰랐다.

조선을 지킨 것도 주자학이며 조선을 망하게 한 것도 주자학이었다. 구한말 민초들은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고, 있는 놈 없는 놈 함께 돕고 살자던 유무상자의 동학사상에 빠져들었고 그런 세상을 꿈꾸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몰살됐다. 우리 땅에서 우리 사람들이 부르짖었던 동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다.

아직도 우리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의 물결에 눈과 귀를 막고 있지 않은지 1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막상 써놓고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에 용기를 냈을 뿐이다.

동학농민항쟁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2014년 정읍세무서장을 하면서부터다. 제 고향 장흥 일대가 동학농민항쟁 지역이다 보니 관심을 갖게 됐다. 8년 전부터 정읍에서 동학을 접하게 되면서 동학 관련자료를 수집하게 됐으며 그때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 장항 동학 관련 향토사학자인 위의환 선생이었다.

동학은 평등한 세상을 열망했던 백성들의 꿈과 열정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운동이었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숭고한 역사적 항쟁이었다. 놀라운 점은 장흥 석대들 전투가 일어났던 남도까지 동학운동이 이어지더라. 장흥과 강진뿐만 아니라 완도와 무안, 진도 등까지 동학이 더 세력을 넓혀 나갔다.

전에는 그런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장흥, 강진, 보성, 고흥(흥양)의 동학군과 그 가족들은 그렇게 집과 가축을 빼앗기고 민보군의 보복을 피해 완도군 신지도, 금일도, 금당도, 고금도, 소안도로 피신해 동학운동을 이어갔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소안도는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만주로 독립군을 보내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8월 15일 광복절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국내 다른 곳에서는 훈장받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소안도에서는 독립운동 후손들이 많아 훈장도 많이 받았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사진 제공:호밀밭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사진 제공:호밀밭

 

3.독립운동 수장 ‘김구 선생’의 동학 접주로서 활동과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동학농민군의 활동영역, 전투과정이 궁금합니다.

제 고향 장흥에서 학교를 다닐 때 큰 사건이 있었는데, 다들 쉬쉬하며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을 알려주지 않았죠. 조선군 일천 명과 일본군 이천 명 등 삼천여 명의 조일연합군이 삼만여 동학군을 공격했다.

우금치에서 동학군 남접과 북접이 조일연합군에 밀리자 동학 북접군들은 충북 보은과 괴산 쪽으로 후퇴했지만, 그곳에서 일본진압군에 의해 학살됐다. 충북 괴산이나 보은에서 부실전투(부실리)라는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으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곳은 동학세력이 컸던 곳이다. 동학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황해도 해주까지 이어지는 동학혁명이 이뤄졌다.

1872년에 동학도들이 충북 보은에서 집회를 하는데, 황해도 해주 접주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선생이 참석했다. 동학은 전국을 포접제로 운영했다. 그 구조는 포접 단위인데, 몇 사람, 몇 집이 모이면 포가 되고 열 집 이상이 모이면 접이 된다. 그래서 접주와 대접주는 동학 조직의 간부급이다.

동학 접주였던 김구 선생이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남은 동학 남접군들은 그렇게 남쪽으로 밀리고 밀려 나주를 거쳐 장흥으로 모이게 됐다. 장흥과 보성에 동학군들이 삼만여 명이 모였다.

그렇게 1894년 12월 추운 겨울 우금치부터 동학군을 진압해 내려온 삼천여 명의 조일연합군과 동학농민군은 장흥 석대들에서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때 동학군은 공식적으로 사천여 명이 학살됐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일만여 명이 넘게 말살됐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 넓은 뜰, 탐진강 양쪽의 넓은 뜰을 석대들이라 한다.

동학농민항쟁은 장흥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15년 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됐다. 장흥 지역은 동학농민항쟁 시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고 처절한 보복으로 인해 기미년 만세운동 당시 유일하게 만세를 부르지 못하는 지역이 됐다. 이러한 고증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다큐소설을 집필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사진 제공:호밀밭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사진 제공:호밀밭

 

4.동학군 후손과 조선관군의 후손들은 반목하며 같은 날 조상의 제사를 준비했다. 나라의 잘못으로 민족대립의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은 이제 용서와 화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130리 탐진강은 영암 금정산에서 발원해 유치와 장동을 흘러내려 한 많은 장흥읍 석대들을 적시고 강진만까지 흘러내려간다. 그때 1894년 12월에 벌어졌던 장흥 석대들 전투가 있기 전, 동학군이 장흥성과 강진성, 병행성, 흥양성, 보성까지 함락시켰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학군들이 장흥을 몇 달 동안 점령하면 동학의 세상이고, 그 반대가 되면 조일연합군의 세상이 번갈아 반복되면서 마을은 서로를 학살하고 반목했다. 그때 동학군과 조선관군이 같은 날 동시에 전사를 하니 제삿날이 같았다. 그래서 동학군 후손과 조선관군의 후손들은 같은 날 조상의 제사를 준비했다. 장흥 읍내 시장으로 제물을 사러왔던 그 후손들은 그 당시 동학군의 자식인지, 관군의 자식인지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5대에 걸쳐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살았다. 심지어 서로 결혼도 시키지 않고 반목해왔다.

현재는 어느 정도 그러한 갈등이 희석됐다. 관군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충을 실천한 사람들이고 동학군들은 일본 외세가 쳐들어와 활개치는 상황에서 쓰러져가는 조선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의를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후손들은 용서와 화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잘못을 한 것은 위정자들이다. 고종을 위시해 민씨 정권이 일본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에 백성들은 화를 당하고 고통을 받았다. 그런 마을이 특히 장흥이다. 6·25전쟁 때도 좌우가 나뉘어 고통받았다. 우리 근대사의 현실이다.

실존하는 이방언 동학군 대접주를 소재로 소설을 썼지만, 실제 주제는 탐진강 물줄기처럼 하나로 흘러가서 지난 아픈 역사적 사건들을 잊고 화합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과 의미를 담았다.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결국 더 나은 미래를 살기 위해서다. 어찌보면 구한말 우리들의 반성문이다. 다시는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점을 동학이라는 소재로 써서 표현한 것이다.

 

장흥향교                                                                                                                사진 제공:호밀밭
장흥향교                                                                                                                사진 제공:호밀밭

 

5.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며 전라북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중추원 부의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 등을 지내며 우리민족에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

장흥부사와 고부 기포 당시 안핵사로 부임해 만행을 저질렀던 이용태는 1910년 한일병탄에 기여한 공으로 남작 작위를, 1911년 2만5천 원의 은사공채를,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살았다.

장흥부사를 지내고,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 중에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박제순은 을사 5적신의 한 사람이다. 국권피탈조약에 서명해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당시 교도소 영관으로 일본군과 함께 장흥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이진호는 일제강점기에 전라북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중추원 부의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칙선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살았다.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에 초토영군,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이 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이두황은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살았다.

 

관아터(농민군 점령지)                                                                                              사진 제공:호밀밭
관아터(농민군 점령지)                                                                                              사진 제공:호밀밭

 

6.국내 권위 있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승원은 ‘탐진강’의 역사적 의의와 저자의 고뇌에 함께했다.

문학은 잘 모른다. 문학에 소질은 없다. 다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집필하게 됐다. 탐진강은 역사적 사실이 담긴 역사소설이다. 장흥에 동학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이 많다. 그 분들의 도움과 고증을 통해 열심히 썼다. 책 속의 그림들도 장흥의 유명한 민속 향토 작가인 박홍규 선생이 그려주셨다.

이러한 고마운 분들의 노고로 탄생한 소설이다. 그리고 이 분들과 함께하기 위해 인세 전액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기부했다. 앞으로도 탐진강 판매 인세 전액을 동학농민항쟁의 숭고한 뜻이 담긴 이곳에 기부하기로 했다.

현재 소설 <탐진강>은 영풍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병영성                                                                                                                    사진 제공:호밀밭
병영성                                                                                                                    사진 제공:호밀밭

 

 

*은산 이판식 작가 프로필

장흥고등학교 졸업.

국립세무대학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前 청와대비서실 행정관.

前 광주지방국세청장.

현 세무법인 bkl(비케이엘) 회장/대표세무사.

 

이판식 전 광주지방국세청장이 펴낸 소설 <탐진강> 표지.
이판식 전 광주지방국세청장이 펴낸 소설 <탐진강>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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