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카톨릭(Catholic) 성직자인 신부의 서품식은 다른 기독교 예전보다 성대하고 엄숙하다. 그 서품식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순명을 약속하는 신임신부의 각오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존재도 버리겠습니다.’라는 자기 죽임의 엄숙한 약속이다. 그래서 신부에게는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독신이 강요되었다. 지금은 어느 종교이고, 성직자 구하기가 힘들다. 불교에서는 젊은 스님이 없어 사찰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개신교회도 신학교의 입학 숫자 정원 채우기가 어렵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신학교 입시율은 서울의 명문대학 입시율에 버금가기도 했다. 특히 천주교회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라든지, ‘부모를 떠나 오직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교회의 자원하는 노예가 되겠다’는 약속이 두드러지게 압권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외적(外的)으로 자신 외에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숱하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를 버리는 일은 호락호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혼은 하지 않으나 이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숙이 피어오르는 경우 물리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고, 어떤 생각(念)이나 절제(節制)의 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불교의 경허(鏡虛) 스님에게 추운 겨울 눈이 내리는 깊은 밤에 한 여인이 찾아들었다. 스님은 얼마를 그렇게 동거하면서 지냈다. 보살들과 그를 따르던 신도나 스님들은 억측하고, 경허 스님을 비하하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추녀에 눈이 녹아 낙수 소리를 내는 아침, 드디어 경허스님의 방에 함께 기거하던 여인이 격자무늬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심한 한센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었다. 경허 스님은 여자도, 한센병 환자도 아닌 얼어붙은 한 생명을 품어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경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가히 신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신부님들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개신교 신도들이 말하지만, 그 때마다 그분들은 격심한 고독과 싸우고 있는데 그나마 술, 담배가 조금 위로가 된다면 백번 선물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변명 아닌 대리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인간의 본능은 그런대로 이길 수 있다고 치자. 한 가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심이다. 장발장이 성당의 금 촛대를 훔쳐간 전과자를 두고 “내가 선물했소”라고 말하는 그 신부는 양심을 속였지만, 용서를 지킨 신부이다. 양심은 천부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 파수대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양심은 문화의 한 조각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 어느 부족은 사람을 많이 잡아먹은 자가 존경과 존대를 받기 때문에 사람의 이를 뽑아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념(理念)은 무엇일까? 이것 역시 배움을 통해 익숙해진 생각일 것이다. 성서에 의한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다 휴지통에 버리고 자신이 모신 내적주(內的主)의 노예로 사는 것을 즐거워해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조차 사치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베드로를 그들은 교회의 수장, 첫 교황이라고 한다면, 신부는 양심과 이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개신교 목사는 평상복을 입고 생활한다. 그러나 신부는 노예 복장을 하고 다닌다. 신부의 목에 두르고 있는 하얀색의 천은 ‘나는 주님의 노예입니다’라는 상징이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든, 믿지 않든 신부가 식사하면 그 음식대금을 받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어느 날 신부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수녀의 두 어깨에 팔을 걸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참사람과 참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이 성을 초월하여 참 아름답게 보였다. 그날 그들의 뒷모습을 비추는 석양은 여느 날과 달리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인간은 어느 누구든 신심(信心)이 있기에 인간 최후의 마지막 임종 시에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것은 세상에 어떤 존재도 신뢰하기 어려우나, 신(神, christ)은 신뢰할 수 있어 그분의 말을 말씀이라 하여 로고스라고 하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을 믿기에 내가 다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잘 돌아가고, 사람들이 먹고살 만하면 신(神, christ)은 저만치 떨어져 있다. 마치 시어머니가 아들, 며느리가 잘 살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김을 받는 것 같과 같다. 그러나 아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자기 손자를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자기 뼈를 울겨 먹이며 그 손자들을 돌본다. 그땐 시어머니가 그 가정에 다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먹고살 만해진 것 같다. 절에 불공드리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 하고, 교회 기도원도 텅텅 비어 바겐 세일을 한다. 이걸 보면 시어머니 같은 하나님도 멀찍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저 밑바닥에 숨죽이고 계실 뿐이다. 그러다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든 자기를 부르면 귀신처럼 뛰어나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사랑의 종(從)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사람은 종교적 존재이고, 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

스탈린의 어록을 보면 사회주의를 주창한 스탈린조차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모르지만, 자신의 세례명은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신부가 되어서 자기가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주인인 예수를 죽인 것이다. 막시즘은 사람은 사람과 투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을 주장한 것을 보면 칼 막스도 자기 자신이 자신의 주가 되어버린 신부가 되지는 않았는지 의구심이 간다. 순진한 신도들은 신부가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신부가 ‘사람이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으니 그 신부의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실까? 사랑의 주님이기에 길이 참아 사람을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게 하고, 자신이 대신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으시지는 않을까? 그래도 그를 신부로 일하도록 천주교회는 결정했다. 잘한 것이다. 다음에는 천주교회가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을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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