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 1886-1973년)은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 민족의 본래 권리에 의해서, 그리고 UN 총회 결의에 의해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국가의 창립을 선언하는 바이며, 이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던 것이다. 바로 그날 밤 이집트 공습의 시작으로 아랍권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이후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한 기나긴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다. 마사다(Masada)는 요새이다. 히브리 어원의 뜻이 그러하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사해(死海) 서쪽 바위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기준 40m가 채 못 되지만 사해 기준으로 434m 높이이다. 정상에는 최장 600m, 너비 320m 평지가 펼쳐있다. 천혜의 요새이다. AD 72년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마사다를 포위했다. 당시 그곳에는 반란군의 일파인 시카리(Sicarii, 자객이라는 뜻)들과 피난민 등 967명이 피신해 있었다. 지휘관은 엘르아살이었다. 함락은 쉽지 않았다. 포위가 해를 넘겼지만 항복의 기미가 없었다. 천혜의 조건에다가 장기항전에 대비해 식량과 물을 충분히 비축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마사다 최후의 날 5월 2일 엘르아살은 동료들에게 연설했다. ‘나의 고결한 동료들이여, 우리는 오래전부터 결코 로마인들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고, 우리의 이 같은 각오를 실천에 옮길 때가 다가왔다. 우리가 먼저 처자식을 죽인 다음 우리도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읍시다. 이렇게 자유를 누리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기념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요.’(요세푸스 Josephus, <유대 전쟁사>) 그대로 결정했다. 960명, 로마군이 마사다로 진입했을 때, 그들을 죽음의 정적이 맞아주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예루살렘 서쪽에 종교적인 율법 중심지에서 살 수 있는 허가만 받았다. 그 외는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유대 국가는 종말을 고하고, 랍비들로 구성된 종교만 남았다. 전 국민은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건만 독특한 문명, 땅 없이 정처도, 조국도 없는 유랑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와 학살을 당했다. 1492년 스페인 박해, 1648년 동유럽 대학살,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600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지금 이스라엘 국민은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본 한국인의 이야기였다. 흑인이 사는 곳에 유대인들이 들어가면 흑인이 도망을 가고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한국인들이 가면 유대인들이 도망을 간다고 했다. 사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식료품 중 가장 힘든 채소 장소, 세탁소 운영, 주류 판매업을 힘겹고, 어렵고, 고생으로 때워야 하는 그런 미국살이에서 유대인을 능가하는 살이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보면 유대인들보다 한국인들 고난의 역사가 더욱 무겁고, 힘들며, 그 횟수가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형 경기장에서 무슨 경기를 하든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훈련장에서 얼마나 땀을 흘리며 고단한 연단을 받느냐이다.

대한민국 역사는 국난극복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외세침략을 극복하며 견디어왔다. 고구려는 여러 차례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마침내 당에 패배해 멸망했고, 고려는 거란(요), 몽골 침략을 극복했으며, 조선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위기를 넘기며 생존했다.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한 횟수가 많다. 사가(史家)마다 다르게 말한다. 993회라고 하기도 하고, 대충 1,000회 이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작은 노략의 숫자를 제외하면 역사에 기록될 정도는 90회라고 한다. 그 중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단연 임진왜란(1592-1598년)과 일제강점기이다. 살상과 약탈, 핍박과 박해, 무고한 선량한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전토를 빼앗겼다. 한 민족의 고난은 고통만이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전 중에 지혜서 욥기가 있다. 한 의인이 지독하게 고난당한다. 자기가 믿고 있는 야훼 신이 막무가내로 고난을 퍼붓는다. 가축이 몰살하고, 머슴들이 죽고, 자녀가 죽은 다음 아내와 자신만 남는다. 아내가 앙칼지게 소리치고 분을 내고 떠나버렸다. 당신이 믿는 신을 욕하라. 그리고 죽어라. 욥 자신마저 피부병이 전신에 퍼져 견딜 수 없어 한다. 개가 와서 상처를 핥는다. 그래도 자신이 믿는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참는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자기 스스로 위로한다. 고난을 인내케 하고, 인내 후에 그의 삶은 고난 전 삶보다 비교할 수 없이 향상이 된다. 유대인들에게 지혜를 주는 글이다. 고난을 인내하면 질 좋은 삶이 온다. 그 열매는 원인 없이 창조된다고 하는 계시를 아기 낳는 이야기로 상징한다.

지금 한국은 세계 6위 국가이다. 일본을 앞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앞질렀을까? 뜻있는 선조들은 고난 중에 인내하고, 극한 고난 중에서도 자녀를 낳고, 훈계를 하고, 온몸을 갈아 공부를 시켰다. 지금의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붓듯이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철학은 낙(樂)이었다. 고난을 참으면 반드시 즐거움이 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세계 6위,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왠지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기도 하고, 허위 같기도 하고, 번거롭게 들리기도 한다. 왜일까? 지금 한국인들은 고난당하는 것을 우매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결혼도, 출산도, 고난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고난을 낙으로 삼는 민족성을 지우면 지금부터 내리막이다. 선조들의 고난으로 지금이 있다. 경거망동할 수가 없다. 우리 때문에 오늘의 영광이 있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해도 국민 없는 나라는 이 땅 어디에도 없다. 해산의 고난은 나라를 낳는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자녀를 많이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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