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설날이 다가왔다. 설날은 뭐니 뭐니 해도 세배가 큰 행사였다. 그 당시(1950-60년대) 세배는 온 마을, 온 읍내를 다니면서 온종일 세배를 드렸다. 친척은 물론이고, 담임선생님에서 면장댁까지 다녔다. 온종일 세배를 드리고 나면 저녁때는 벌어드린 세뱃돈을 세는 재미가 쏠쏠했다. 호롱불 아래서 세뱃돈을 세면서 세계에서 최고 재벌도 눈 아래로 보였다. 초등학교 상급생이 되던 어느 설날 세뱃돈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달걀을 사기로 했다. ‘달걀을 사서 암탉이 있는 이웃집에 부탁해서 달걀을 부화해 달라고 해야지.’ 닭을 키우고 다시 또 부화하고, 닭을 키우고 부화한다는 계획을 세우느라 해 지난 달력 뒷면에 가득하게 숫자를 적어보던 설날 밤도 있었다. 머리카락에 불이 난 일도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하지 말라고 하셨다. 몸도 약하고, 또 그 당시 석유가 귀한 시절이라 해가 지면 호롱불을 켜지 않고 잠을 자라는 주장이었다. 사람은 천체의 회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거창한 천체논리까지 인용하시며, 절약을 당부하셨다. 선생님이 설날에도 숙제를 내주셨다. 노느라 숙제를 하지 못했다. 설날 밤 호롱불을 벽 등잔(호롱불 하나로 두 방을 밝히기 위해 벽을 뚫어 한 벽면에 창호지를 바르고 벽 위에 올려놓은 등잔) 위에 있는 호롱불을 가만히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호롱불을 켰다. 심지를 조금 올렸다. 환해졌다. 그다음 호롱불을 책으로 가로막았다. 그다음 엎드려 숙제를 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이 닿았다. 드디어 머리카락이 타기 시작했다. 놀라 화들짝 일어나보니 머리카락이 타고 이불에 불이 붙고 있었다. 상상만 해보시라. 그해의 설날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추억이다.

설, 어린 시절 설날은 천국이 이루어진 날이다. 일 년에 소고깃국이 밥상에 올라오는 경우는 한번 내지 두 번이다. 생일날 미역국에 소기름이 한두개 둥둥 떠다니는 것 외에는 없다. 설날은 틀림없이 소고기가 국에 들어있었다. 설 전, 대목장날 푸줏간 앞에서는 줄을 선다. 주인아저씨 앞에 서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많이 주게 해주세요.’ 소고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아저씨 앞에 서면 똑같이 ‘많이 주세요’라고 말한다. 소고기를 사봤자 반 근이다. 반 근의 소고기만 받아오지 않는다. ‘아저씨 기름 좀 주세요.’ 요즘 우리가 등심을 사서 굽기 전 잘라 내버리는 기름은 양호하다. 소의 어느 부위인지 모르지만 완전 기름 부분을 싹 베어준다. 소고깃국이지만 채소를 많이 넣어 채소국이다. 일 년에 가장 풍요로운 설날이 이런 풍경이니 보통의 일상의 식탁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쌀로만 지은 밥을 먹어보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것은 어머니가 화롯불에 윤디(삼각형 쇠뭉치 다리미)로 데우기 위해 화롯불을 안방에 들여놓는다. 그땐 달걀껍질에 하얀 쌀을 조금 넣고 화롯불 위에 얹어 놓는다. 얼마를 지나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나무젓가락으로 달걀껍질 밥(이밥)을 먹을 때의 그 맛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못 살던 시대, 절대빈곤 시대에는 먹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때는 집이 춥고, 배가 고프고 허기졌으며, 요즘의 자연인들이 사는 모습으로 살다 보니 몸은 한 시도 쉬지 못하고 움직여야 겨우 먹고 살았다. 그러나 풍요로운 것이 있었다. 정(情)이다. 난산을 한 어머니는 도시 병원으로 가서 입원 중이고 아이가 먹어야 할 젖이 없었다. 그때 젖동냥을 다녔다. 동네 아주머니 중에 젖이 나오는 아주머니들은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젖을 먹여 주었다. 그땐 젖도 귀하였다. 어머니들이 먹는 음식이 영양식이 아니다 보니 자기 자식 먹이는 젖도 충분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젖동냥을 모두 받아들여 먹여 주었다. 농사는 두레였다. 동네 유일한 분쟁의 원인은 논물대기 때이다. 윗논에 물을 가득 채워야 아래 논에 물을 댈 수가 있다. 계단식 천수답 논은 하늘에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물 대는 기회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날이다. 이때, 윗논, 아랫논이 다툴 수 있다. 그것도 잠시, 저녁이면 의례 두 농부는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동네가 떠나가라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두레로 농사하다 보니 노동자가 없다. 모두 지주(地主)만 있다. 물론 부잣집은 머슴이 몇 사람씩 있었다. 머슴은 일 년 일을 마치고 다음 해 계속 머슴살이할는지 그만둘는지 결정도 한다. 세경(일 년 인건비를 쌀로 받는 것)도 설전에 받는다. 주인이 가라고 하지 않으면 수십 년 한 집 머슴을 산다. 어느 날 그 머슴이 한 뼘 논을 사면 지주가 된다. 그리고 부족한 생활비는 소작으로 메꾸어 산다. 주로 설을 지나고 나면 떠날 머슴은 떠나고 남을 머슴은 남는다. 머슴이 짐을 싸는 날 의례 주인집 어린아이들은 머슴 아저씨에게 팽이를 몇 개씩 깎아달라고 조른다. 내일 떠날 머슴이 나무를 깎고 깎아 밤새 팽이를 만들어 주고 떠난다.

설날은 마냥 기쁘기만 하다. 그러나 요즘은 설날이 없다. 보통 매일매일이 설날이다. 잘먹고 잘산다. 그 대신 기쁨이 없다. 그리고 정(情)이 없다. 지나친 자기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경쟁하며 살기 때문이다. 삶은 풍요로우나 행복할 줄 모른다. 행복은 정에서 오는 것인데 정이 없으니 말이다. 설날을 잃은 현대인들이 외로워 보인다. 많은 남성들이 자연인을 로망한다. 설날이 기다려지면 가난한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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