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금식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금식은 많은 종교에서 영적(靈的) 성장, 순수성 강화, 집중력 향상을 목적으로 시행한다. 또한 건강상 이유로 금식하기도 한다. 금식은 체내 독소를 제거하고, 정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자기 의지력 강화나 통제를 위해 하기도 하며, 이슬람에서는 로자(달리아)라고 하는 한 달간의 금식 기간인 라마다가 있다. 기독교 성서에서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야훼에게 용서를 구하는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금식을 한다. 예수는 사역 초기 금식으로 시작을 했다. 그것은 다가올 시험을 이기기 위한 영성의 단련으로 볼 수 있다. 결과는 40일 금식한 예수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이기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야훼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여 승리하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교훈으로 삼고 금식하기도 한다.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보통이다.

그런데 만약 감옥에 있는 죄수가 금식을 한다고 하면 아마 그가 죽도록 방치할 교도관은 없다. 형을 집행하고 있는 사법기관에서 형 집행의 기간이 있기에 죄수가 살아있어야 집행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중요한 범죄자일 경우 수사망이 옥죄어 오고 자신의 죄가 탄로가 날 경우 소속 공동체나 단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고 전 서울시장 한 분도 그러했고, 전교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분도 그러했다. 어느 한 대통령도 그 범주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재 광화문에 금식을 하고 있는 분은 왜 금식을 하고 있을까?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 찾아온 격려자에게 윤석열 정부의 일방적인 국가 경영에 대한 견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식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북한산 자락의 도롱뇽 서식지라고 해서 서울외곽도로 공사를 막고 금식했던 여성 스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금식은 결국 천문학적 국고만 손실시키고 끝난 금식이며, 도로공사가 끝난 후에도 도롱뇽은 잘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성서는 금식을 하되 아무도 모르게 금식하라고 권하고 있다. 보통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금식을 하고 초췌한 얼굴과 의복으로 거리에서 나와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고 자신이 유대교의 계율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위선을 금하라는 말씀을 했다. 지금 광화문에서 금식을 하시는 한 정치인이 있다. 그분은 확실치는 않지만 숱한 형사사건에 연류가 되어 있고,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식할 자격이 없다. 자신이 유죄가 될는지, 무죄가 될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건강해야 자기방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범죄가 단독범일 수 있고, 공범이 있을 수가 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방어해야 공범도 살릴 수 있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대체로 범죄자들이 의리가 있다. 조직폭력배가 가장 의리를 잘 지키는 집단이라 하지 않는가? 몸이 허약해서야 자기방어를 온전히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된다. 만약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자기 범죄를 조사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의 건강을 허약하게 만들어 조사를 회피하려는 술책일 수도 있다. 즉, 중환자실로 가는 경우, 조사받는 기간을 늦출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건강해지면 조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완전히 조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선배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조사가 압박해오자 한 사람은 고향 땅에서 은밀하게 자기 몸을 투신했다. 한 사람은 서울 북한산 자락에 숨어서 죽었다. 이 죽음은 아직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한 사람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 역시 타살인지 자살인지 모른다고 한다. 만약 그 조직의 전통을 따르자면 은밀한 곳에 숨어 금식해야 한다. 광화문에 앉아서 금식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정통방식이 아닌 것같다. 그렇다면 소속집단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는 선대의 반열에 반하는 행동이다. 조사를 받고 무죄 판결을 받은 후 금식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 같다. 궁색한 금식이 계속된다면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즉, 동정을 바라고, 자기 학대를 통한 구제를 바란다면 어느 지하철 계단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깡통을 앞에 두고 애원하며, 구걸하는 소년과 별로 다르지않는 격(格)이 되는 것이다. 앵벌이처럼 금식하려면 차라리 정정당당한 정치인으로서 실력으로 상대하는 것이 훨씬 신사적이지 않을까?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를 이슈로 삼아 국민을 선동하여 제2의 촛불혁명의 불씨를 붙여 보자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만 이미 촛불은 꺼지고 말았다. 촛불혁명의 허구를 본 국민들은 처음처럼 동조하지 않는다.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여 군중심리를 이용한 성공률은 한 번에 가능한 것일 뿐 재창출되는 기적이 아니다. 차라리 일본의 원전 폐수를 방류하지 않게 하는 대안을 내어놓고 일본으로 건너가 생사 결단하라. 요즘 반대 의사 행동을 했다고 하는 사진만 찍고 오고 있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총선에 밥숟가락 놓자는 심사로 위선 행동을 그만두고 후쿠시마에 가서 금식하라. 그런다고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가 중단될까? 누구도 그 금식을 안타까워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단식은 물도 먹지 않는다. 금식은 물은 먹는다. 그런데 너무 건강하다. 거짓 자해 공갈 같다. 금식은 자기 신념에서 시작된다. 자해는 타자의 의지를 꺾기 위한 자기 몸의 해함이다. 금식인지 자해인지 자신만 알고 있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