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생명, 손으로 잡으면 잡힐듯하면서 생명은 잡히지 않는다. 생명, 생명이 떠나갈 땐 순간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검불처럼 꺼져버리고 나면 믿어지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한 생명이 올 때는 생명을 잉태하고, 분만하고, 양육하는 그 절차마다 또 다른 생명이 한 없이 쏟아부어져야 가능하다. 한 사람이 성인 되는데 들어가는 사랑은 생명의 뿌리이다. 그 질량(質量)을 누가 측정할 수 있을까?

새해를 맞으며 줄곧 마음에 피어오르는 생각은 온통 ‘생명’뿐이다. 왜 생명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는 걸까? 지구촌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에서 생명 탄생을 거부하는 몸짓이 가장 강한 나라이다. 인간이 만든 천국이 있다면 가정일 것이다. 그 가정에는 가정되게 하는 요체가 생명이다.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다. 가정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부부는 당연히 이성(異姓)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성(同姓)일 수도 있다고 한다. 워낙 이러한 동성부부가 실재함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회 합의적 허용을 하는 것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톨릭의 수장 교황도 이를 인정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의 생명은 신의 계시(神의 啓示)인데 계시 모음집인(Bible), 성서에는 어디에도 동성부부를 허락한 바가 없고, 철저히 금하고 있다. 그런데 왜 가톨릭의 수장이 이를 허용했을까? 예수 정신일까? 예수는 누구든 정죄하지 말라는 뜻을 받들었을까? 의문이 된다. 기독교 경전, 성서는 절대가치가 하나 있다. 생명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가 와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고, 삼일만에 부활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범죄한 인간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므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심은 자가 죽고, 모든 죄를 용서했었다. 그리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예수 부활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살도록 했다. 불교도 죽음을 넘어 윤회로 생명을 살린다. 그런데 그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이성부부와 동성부부는 동일시하여 가정으로 인정할 때,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룰 수 있으나 생명은 태어나게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생명의 샘을 막아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이 지구촌에 사는 인간은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영생(靈生)일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 부부가 되고, 부부가 다시 생명을 낳는 부모가 되는 생명 순환을 위해 하나님(神)은 천지창조를 했다고 한다. 우주는 생명의 둥지이다. 천조개의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고, 다시 천조개의 은하수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인간이 의식 속에 들어온 천체다. 천체의 실체는 누구도 모른다고 해야 진실일 것이다. 이 천체가 생명의 둥지라고 생각해 보라. 생명은 시간의 목적이며, 공간의 목적이며, 초월의 목적도 생명에 있다. 그것은 부활이 생명 되살리기이기 때문이다.

새해에 기도가 있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 공존의 소원은 생명 건강일 것이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하는 인간이 있는가? 실제 중동의 하마스 무장 정파와 이스라엘 사이에도 생명 죽이기가 일어나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생명을 죽이는 살인행위를 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역시 대한민국에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만들고, 2024년에는 국민의 생명을 죽일 것이다라는 논조의 협박을 하고 있다. 이 땅에는 생명을 낳고 살리는 사람과 생명을 죽이는 사람으로 분리가 된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욕망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낌에서 오는 반작용이기도 하다.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빼앗는 대적감(對敵感)은 정신적 질병의 괴질일 수도 있다. 한국의 남성과 여성들이 자녀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는 혼전 자녀 생산도 가정으로 인정하고, 결혼을 한 가정과 동일한 혜택을 주겠다고 한다. 정부의 생산력을 높이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생명생산을 높이는 데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왜 자녀를 낳으려고 하지 않을까? 이 문제의 이유를 본인들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간단하고, 단순하다. 사랑하기 싫어서다. 여기서 사랑이란, 자기 생명은 사랑하되 남의 생명(자녀 생명)은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녀를 낳고, 양육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내어주어야 한다. 지극한 자기 사랑이 낳은 인식인 것이다. 자녀를 낳으면 자신이 쪼그라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희생하고, 남의 생명을 낳고 기른 다음 돌아올 보상도 미지수인 것이다.

한 여성은 이젠 자녀도 필요 없고, 맞추어 살아야 할 남자도 필요 없다. 내 마음에 드는 AI로봇을 사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예언자인가? 선견자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자기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AI로봇에 감정이 심어지고,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능이 심어지고, 인간의 욕망의 요구에 충족시키기 위해 AI로봇에서도 욕망을 장착해주는 날이 오면 생명의 둥지는 인간이 만든 인간에 의해 스스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낳고 길러지는 인간에서 만들어진 인간에게 스스로 생명을 바치는 몸부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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