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주간운세] 오늘 아침 8시 10분에 전화를 받았다. 한 대학병원의 진료 예약을 한 달 이상 연기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스케쥴이 맞지 않아 예약을 일주일 연기해서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담당 의사가 호통을 치는 것이다. 일주일씩이나 약을 먹지 않고 어떻게 치료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치료를 위해서 치는 호통이라 생각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미안하다고만 하였다. 사실 건강을 지켜주려는 사명감의 발로로 생각되어서이다. 한편으로는 혹시 이의를 제기했다가 진료에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염려도 되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생명 독점권자이다. 태어날 때도 의사의 손에 의하여 태어나고 사망선고도 의사에 의해서 사망선고를 받는다. 물론 살아가면서 건강을 돌보는 것도 의사의 영역이다. 이러고 보니 의사 앞에서 누구도 반항할 수가 있겠는가? 벗으라 하면 벗고, 입으라면 입고, 누우라면 눕고, 앉으라면 앉는 것이 진료 현장에서의 환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저항을 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이유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노인이 피부과를 갔다. 하필이면 여의사였다. 다짜고짜 바지를 내리라는 것이다. 엉거주춤하는 노인에게 ‘안 내리려면 나가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바지를 내렸지만, 그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의사들은 대정부(對政府) 싸움에서 이기기만 했지 져본 일이 없다. 약사들의 조제권까지 완전히 의사들이 틀어쥐고, 처방전 없이는 약을 지을 수 없게 하였다. 이젠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하면 환자들은 갈 곳이 없다. 외통수 장기를 두듯이 환자들은 설 자리가 없다. 현재도 의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직도 의사들은 권위와 신뢰와 존경을 잃지 않은 유일한 직종이다. 종교인과 법조인, 정치인들의 권위와 교수와 교사까지 자신들의 권위를 자기 발로 차고 나갔다. 그러나 의사는 국민 대다수가 선망하는 직종이고, 신뢰한다. 치료를 받을 때 환자는 자기 몸의 X-ray 화면 사진은 보지 않는다. 봐야 모른다. 자신의 폐를 보여줘도 모르고, 심장을 보여줘도 모른다. 의사의 입과 얼굴만 초조히 보고 있다.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입술을 꽉 다물면 이를 보면서 느끼는 환자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한다. 입원했을 경우 회진을 하면서 말 한마디나 표정에 환자는 하루 병상 생활에 희비가 엇갈린다. 삶의 자리는 발병과 사고가 도사리고 있고, 언제 어떤 병원에 갈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대형병원 응급실 문 앞에는 일찍 오고, 늦게 오는 것이 진료의 순서가 아니다라는 이해하지 못할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화급한 중환자나 사고자는 망연자실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남에서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부산이 지척이고, 지역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헬기를 동원하여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에 소재한 대형병원을 가보면,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다 모여든다. 하기야 웬만한 곳은 3시간 정도의 교통편을 이용하면 서울에 닿을 수가 있다. 결국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병원의 순위가 해마다 매겨진다. 자신이 사는 인근 대학병원은 100위 미만인데 서울의 1번 순위에서 10번 순위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다. 당연히 대형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자존감도 한몫을 한다. 내가 100위 미만 병원에 가면 자기 자신 역시 그 순위와 동등해진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야당 대표까지 지역 의료진을 무시하고, 서울에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들이 지금까지 병원 선택한 것이 현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 문재인 정부 시절, 문재인 케어라고 해서 의료수가를 대폭 낮게 책정한 일이 있다. 하기야 공산주의자들은 의사도 노동자로 본다. 의사가 땀을 많이 흘리느냐? 벽돌을 쌓는 벽돌공이 더 땀을 많이 흘리느냐? 물리적인 잣대로 보고, 의사보다 벽돌을 쌓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이 노동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니 문재인 대통령의 의식으로는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의사들이 약간의 반발은 있었으나 큰 소동은 없었다. 그래도 보편적으로 의사의 소득이 전 국민의 최상위권이다. 지금 자녀를 낳으면 애시당초 ‘너는 의사가 되어라’라고 유치원부터 의사코스를 준비하는 공부를 시키고 있는 가정도 있다.

그런데 왜 의대생을 증원하는 일을 놓고 전 의료계가 반발할까? 모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점권자가 많아지면 서로 경쟁해야 하고, 경쟁하다 보면 세일을 해야 하는 동시에 같은 직종끼리 경쟁으로 인한 독점권을 상실할까 해서가 아닌가? 지금도 지방의 개업의는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요즘은 장비가 의사다라는 의식이 있어 병원을 새로 개업하면 장비가 무엇무엇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환자들의 관심사이다. 그러고 보니 만약 의사가 많아지면 자기들끼리 개원 시설투자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결국 의사의 권위마저 하락하여 환자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것이 싫어서인지 진위는 모르겠다.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권위와 존경과 신뢰받는 의사들까지 자기 이권 투쟁하고, 생명권 자의 자질이 하락하면 환자에게 신뢰를 잃고 나면 치료 효과에도 영향을 준다. 환자는 의사를 신뢰해야 치료가 원만하다.

의사의 파업은 환자와의 싸움이다. 결코 정부와 의사의 싸움이 아님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환자가 있어야 의사도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만 필요한 사람이다. 환자를 버리면 자기 환자의 진료까지 지우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의사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생명 자기에의 자리로 돌아감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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